신미송 국제PEN한국지부 인천지역 부회장
신미송 국제PEN한국지부 인천지역 부회장

인천문화재단이 ‘인천 문화예술인 기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천 원로 문화예술인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창작 과정을 구술로 채록하고 정리하는 사업이다. 문화예술이 갖는 효능의 가치를 보존하자는 의도로 마련한 기록사업이라 반가웠다. 인천문화예술사를 정리하는 데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서 문화예술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를 높이는 데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기획된 듯싶다. 

문화예술이 갖는 가치는 단순 환금성의 계산과는 다른 차원이다. 예술인의 인생과 예술적 발자취를 짚어 보면서 작가의 창작물에 내포된 고유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이와 인터뷰에 응하는 예술인의 진솔한 문화예술적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일이 흥미로울 것 같다. 

원로라는 말은 가볍게 붙이는 존칭이 아니다. 원로는 만추의 자연과 닮아 세월을 이고 지고 품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만추의 계절이 오기까지 땀 흘린 수고로 튼실해진 들판과 과수농장, 가꾸는 손길은 없지만 산야의 풀씨와 유실수들이 인고의 세월을 품어 익어가는 계절이 만추다. 그 원로라는 호칭이 슬며시 내게도 왔다. 익은 결실을 달고 있어야 원로라는 존칭이 번듯할 터인데 버금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개가 숙여질 만큼의 내실을 쌓았는가? 자문을 해 보면 민망한 생각이 든다. 

그 어설픈 원로가 문화예술인 기록사업의 일원으로 인터뷰를 했다. 작가로서의 인생 전반에 걸친 다양한 질문을 받았다. 달변가도 아니고 재치가 있지도 않아 답변이 유려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진솔한 답변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이야기, 고향 이야기, 부모·형제 이야기, 학창시절 이야기, 독서 이야기,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 이야기, 인천과 관련된 이야기, 나의 문학세계관, 문화예술인으로 사는 애환이나 즐거움, 창작활동에 대한 자기 비평과 만족도, 인천에 바라는 점, 출간한 작품 속에 과거의 경험과 정서가 얼마만큼 녹아 있는가, 향후의 작품 활동계획은 무엇이며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다. 지나간 기억의 편린들이 새록새록 서사로 되살아났다. 햇살 고왔던 유년기에도 외로움이 많았고, 그 외로움은 공상으로 날개를 달아 온갖 세계를 날아다니곤 했었다. 

기억에 각인된 책 두 권이 있다. 시튼이 쓴 「동물기」와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다. 책에 빠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늦은 밤에도 책을 읽곤 했었다. 시튼의 「동물기」를 책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바나에 우기가 가까워지면 공기 중에 비 냄새가 바람결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의 표현이 섬세했다. 실제로 내가 그 비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가 되고 난 후 문장 표현에 공을 들이는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됐다. 어린이용으로 편집한 동화책이었지만 동물과 심장의 교감을 나누는 시튼 작가의 마음이 애절하게 전해졌다. 

내 소설이 긴장을 주다가도 급 공감하는 결말 도출로 끝이 나서 맥 빠진다는 평을 듣게 되는 배경이 시튼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튼의 「동물기」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나는 동물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해피엔딩을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이후로 읽은 소설 「제인 에어」도 내가 본격 소설가를 꿈꾸며 습작을 하게 해 준 소설이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습 타파와 새로운 여성상을 그려 낸 작가의 필력과 자존감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내 소설속의 인물들이 독립적 자아를 찾아 성장하는 설정이 많은 배경에는 브론테 세 자매의 소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장시간 이렇게 적나라하게 털어놓기는 처음이다. 지명도가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원로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세월을 살았다. 삶 속에 암각화처럼 기록돼 있는 희로애락을 이제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봐 줄 수 있게 됐다. 고운 햇살도, 폭우와 천둥번개도, 알곡의 수확도, 북풍한설도, 모두 발효된 숙성으로 익혀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원로 문화예술인 기록사업 인터뷰가 나에게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는 의미가 됐다. 작가로든, 평범한 사람으로든 한 생의 궤적으로 남긴 흔적이 얼룩이 아닌 결 있는 무늬로 남는다면 반가운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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