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송 국제PEN한국지부 인천지역 부회장
신미송 국제PEN한국지부 인천지역 부회장

코로나19 변종 오미크론의 위세가 기세등등하다. 작정한 전염력에 일상이 다시 위축됐다. 만나고 먹고 떠나는 즐거움이 움츠러들어 마음까지 얼어붙어버린 것 같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책을 뒤적이고 여행 사진을 보면서 감회에 젖는 날이 많아졌다.

감성적인 문장으로 여행지의 풍광을 그려낸 어느 작가의 여행기를 읽었다. 그가 유유자적 낚은 여행지의 소소한 질감이 그대로 전해져 풍광 속에 내가 동행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호젓한 바닷가 마을, 뱃전에 앉아 잔잔한 바다와 올망졸망한 섬들을 유영하듯 쓴 글을 읽다가 문득 한적한 어촌 마을에서 보낸 하루가 떠올랐다. 

치열한 삶이 분명했을 터인데 어떤 이유인지 그 어촌 마을 사람들은 쉬며 놀며 그물을 걷고 어구를 손질해 물고기까지도 나른하게 헤엄치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어촌 마을을 완만하게 휘어져 들어온 만(灣)에 정겨운 바위섬이 있었다. 따뜻한 햇살에 해풍이 부드럽게 감기는 날, 우리 일행은 작은 어선을 타고 단아하게 앉아있는 섬을 향했다. 섬은 바위 덩어리를 한군데 쌓아 놓은 것처럼 차곡차곡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바위와 바위가 만나는 틈에는 비와 바람이 날라다 주었을 흙이 모여 있었고 거기에 찔레나무가 뿌리를 내려 바위벽을 따라 자라고 있었다. 찔레꽃이 한창이었다. 

옅은 청회색의 하늘과 투명한 바닷물, 흰 몸통에 점점이 박힌 검은 무늬를 가진 바위섬, 그리고 초록의 잎사귀와 순백의 찔레꽃. 우리 일행도 빨려 들어가 섬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섬은 고운 모래사장을 데리고 있었다. 넓이라야 딱 둘이 손잡고 걸을 만한 앙증맞은 모랫길이었다. 우리는 고둥과 굴을 따기도 하고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소녀처럼 깔깔거리기도 하면서 작은 바위섬에서의 한적한 여유를 즐겼다.

여행의 감성을 풍성하게 진열해 놓고 우리는 바위에 누워 오후의 햇살을 즐겼다. 해풍에 실려 오는 바다냄새와 흘러가는 구름과 은은하게 퍼지는 찔레꽃 향기는 글 쓰는 일곱 여자의 가슴에 저마다 고운 채색을 했다.

그때 일행 중 누군가가 이 섬에 우리 사이에서만 통하는 이름을 지어 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섬의 풍경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그냥 왔다가 스쳐 지나가기엔 사뭇 아쉬웠던 터라 흔쾌히 그 제안에 따랐다. 이런저런 이름에 의미를 담아 작명을 하고 있던 중에 어느 작가가 말했다. 

"이 섬은 미송도(島)입니다. 생일 선물로 줍시다."

나를 뺀 여섯 여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찬성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생일날 이곳을 찾은 인연으로 미송도는 내 삶의 서사시가 됐다. 가끔, 미송도를 그려본다. 마음 속 그곳이 보이면 나는 상상의 날개를 펴 섬을 향해 날아간다.

해무가 낀 날에는 바다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게으른 휴식을 취하고 외톨이 바닷새를 불러 날개를 접고 쉬어가라 인정을 베푼다. 물고기떼 잠들고 천체가 운행을 시작하며 섬은 실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일억 개의 블랙홀을 가진 은하계가 비밀스레 가슴을 열고 소곤소곤 전설을 이야기해 주면 미송도는 까무룩 잠에 취한다. 아침 바다 펄떡이며 비늘을 곧추세워 먼 길 돌아온 물고기떼 환영으로 술렁이면 미송도는 말갛게 얼굴을 씻고 새날을 맞는다. 해풍의 긴 머리카락이 섬을 간질이면 미송도는 젖가슴을 들킨 처녀처럼 홍조 띤 얼굴을 구름 그림자에 감춘다.

이름 없이 호젓이 억겁을 살았는데 눈 한 번 깜박할 시간밖에 안 된 미송도 시간이 들려줄 이야기가 더 많다. 제 가슴에 뿌리 내린 찔레꽃조차 무심하더니 침묵했던 세월을 미송도는 하나씩 건져내 곱게 말려둔다. 어느날 예기치 않은 방문으로 미송도를 찾으면 반가운 설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로 그대를 맞으리다.

미송도를 시작으로 일곱 여자들은 생일이면 마음에 드는 자연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선물로 받았다. 진초해(海), 이수로(路), 목연봉(峯), 인혜호(湖), 미해우(雨), 진채운(雲). 일곱 여자들이 받은 생일 선물들이다.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로운 감성과 생각으로 즉흥성을 중시한 낭만적인 악곡처럼, 글을 쓰는 일곱 여자는 각자의 삶을 표현한 서사로 다시 랩소디를 연주할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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