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1970년대 당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서 주관한 ‘전국자유교양대회’가 있었다. 전국의 학생들에게 고전 읽기를 장려하고 필기시험·독후감대회를 통해 우수 학생을 선발해 표창했는데, 지방에서 선발된 학생들에게는 표창식 참석차 생애 최초의 서울 구경 기회도 주어졌다. 다소 획일적인 독서 장려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 덕에 많은 학생들이 삼국유사, 그리스·로마신화, 단테의 신곡 등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을 접할 수 있었다. 

요즘에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필독 권장도서’가 있지만, 영화·게임 등 각종 선택지가 넘치는 상황이라 학생들이 예전보다 독서를 덜 하는 편이다. 교재를 구입하지 않고 한 학기 수업을 마치는 대학생들도 자주 눈에 띈다. 필요한 부분만 교재를 복사하거나 PPT자료만 지참하고 수업을 듣는 것이다. 세상의 트렌드가 그렇다고 하니 이를 크게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학생들이 교재를 구입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래야 논리적·체계적 학습이 가능해지고,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지식과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행간에 담긴 저자의 깊은 뜻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read between the lines).

최근 오미크론의 급속한 확산으로 인해 재택치료자 수가 2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런 강요된 ‘단절의 시기’에 몇 권의 고전을 읽으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 보면 어떨까. 학생 시절에 읽었던 책들 중에 나이 들어 다시 읽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새롭게 파악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책 중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1941년에 출간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20세기 중반 독일에서 전체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설명하면서, 우리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조망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유럽 시민들은 중세 시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했지만, 소수의 자본가들이 움직이는 초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돼 생존과 자아에 대한 무기력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자기를 다시 강하게 구속해 줄 새로운 존재를 찾아 이에 복종하고자 하는 심리가 싹트게 된다고 한다. 즉, 자유 속에서 자아를 상실한 사람들은 점점 자유가 부담스러워지고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자유로부터 도피를 하게 되며,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상실한 ‘자동인형’들은 무력감과 불안감에 휩싸여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보다 강한 권위에 쉽게 복종하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패전 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상실한 독일 하층·중산층이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를 적극 지지하게 된 심리적 배경이 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들은 불안해진 자아를 내던지고 복종과 지배 그리고 기꺼이 이념의 실행을 위한 도구가 돼 투쟁을 하게 된 것인데, 이로 인해 전 세계가 전쟁이라는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에리히 프롬은 파시즘에서 나타났던 사회심리학적인 상황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실제로 전체주의적 위험은 21세기에도 언제 어디서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 루마니아·체코 등 동유럽 국가의 국민들 중 상당수가 무기력과 불안감에 빠져 "차라리 공산주의 시절이 나았다"며 전체주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회심리적 현상을 보이기도 했었던 점도 유념할 만하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토대로 발전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만일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멀리하고 전체주의(또는 권위주의)와 비합리주의를 가까이 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특히 ‘비겁한 도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후대에 부끄러운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강인한 투지와 불굴의 용기를 지닌 국민만이 민주주의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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