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성 전경.
계양산성 전경.

수은주가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날이 잦다. 하지만 한낮 강한 햇살의 노곤한 기운이 온몸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느낌이 들 때면 어느새 봄의 길목에 들어섰음을 느낀다.

 이렇게 또 한번의 겨울이 지나가고 우리는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입춘(入春)이 지나면서 새로운 봄의 온기는 남녘으로부터 하루 15㎞씩 빠르게 북상한다.

 봄이 오면 산과 들녘은 다시금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고개를 내민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새순을 틔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는 젖줄이 다시 흐르고, 온갖 생명들이 태기(胎氣)를 보이기 시작한다.

 도란도란 봄이 오는 소리는 경직되고 부산했던 사람의 마음을 말랑하고 느긋하게 녹여 준다.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 중턱에는 ‘계양산성’이라는 퇴락한 옛 산성이 자리잡았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에 견고했던 성벽은 무너져 돌 무더기가 됐고, 성 내부에 자리잡았던 많은 건물은 모두 사라져 흔적만 남았지만 이들 모두 이 고장의 역사와 전설을 그대로 품은 채 평화로운 자연의 일부가 됐다. 

 근래 계양산성이 새롭게 정비돼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시민들의 쉼터로 각광 받는다. 계양산성은 자연의 싱그러움과 함께 옛 정취를 담뿍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저무는 겨울의 아쉬움을 달래고 새로이 피어날 봄의 기운을 만끽하기에 그만인 시기다. 한 번쯤 북적북적한 도회지의 삶을 내려놓고 자연 속 고성(古城)을 찾아 호젓하게 걸어 보자.

 산성 한 바퀴 돌며 발 딛는 곳마다 느껴지는 흙의 싱그러운 기운을 느끼며 산성이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계양산성

‘산성’이라고 말하면 대개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외진 곳에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계양산성의 입지를 보면 산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 상당한 괴리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된다.

계양산성은 인천지하철 1호선 계산역으로부터 도보로 넉넉잡아 20분이면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도심과 지근거리인, 그야말로 ‘역세권 유적’이라 부를 만하다.

여느 산의 초입처럼 등산용품점과 식당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 완만한 경사의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트인다.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 몇 그루와 너른 잔디가 깔린 구릉지의 풍경은 청량함을 선사한다. 일부 시민들이 이곳을 두고 ‘인천의 대관령 양떼 목장’이라 부르는 이유다.

계양산성이 위치한 계양산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정맥의 일부 구간으로 해발고도 395m이다. 강화군의 마니산(472m)을 제외하고 인천 내륙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계양산성은 계양산의 동쪽 200m 높이의 완만한 중턱에 자리잡았다. 한강 하류지역과 굴포천 유역에 드넓게 펼쳐진 김포평야에 우뚝 선 계양산은 인천 시가지를 비롯해 서쪽으로 강화·영종과 서해 연안, 동쪽으로 서울의 북한산과 잠실 롯데타워, 북쪽으로 한강유역과 김포·검단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양산은 높이가 낮지만 조망이 좋아 주변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이 내려다보인다. 이 같은 장점은 옛부터 이 지역이 정치·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된 주된 이유다.

조선시대 중·후반부터 조금씩 이뤄졌던 간척사업으로 인해 대부분이 육지로 변했지만,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계양산 일대는 서해안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길이 계양의 변두리에 사방으로 났으나, 한 면만 육지로 통할 뿐이고 나머지 세 면은 전부 물이다." 

고려 고종 때 계양도호부사를 지냈던 정치가 이규보(1168∼1241)가 계양산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썼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중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에 적힌 대목이다.

이규보의 글로 미뤄 당시 계양산은 해안과 내륙을 두루 감시 가능한 천혜의 요새 역할을 했다. 계양산은 계양산성이 입지하기에 충분한 지리적 요건을 제공하는 장소다.

# 계양산성의 역사와 현황

인천지역의 고대 정치·군사 문화를 보여 주는 산성인 계양산성은 고구려 전성기였던 5세기 무렵에 축조됐다고 추정된다.

당시 계양산성은 서해와 인천 본토를 비롯해 서울지역의 방어를 관장하던 주요 거점이었다. 한강의 하류와 서해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총 둘레 1천180m인 계양산성의 전체 면적은 6만2천863㎡이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산성 중에서는 규모가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계양산성의 성벽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응회암과 화강암, 편마암 등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성벽이 그대로 남은 곳은 그 높이가 7m에 달해 성의 규모를 짐작게 한다. 

계양산성은 산 정상부가 아닌 동쪽의 낮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낮은 봉우리와 계곡부를 마치 나이테를 두른 양 장타원형으로 둘러싼 ‘사모봉형’의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의 몸체 부분은 대부분 잔존한 상태이며, 외벽은 80%가량 유실됐다. 지금까지 10차에 걸친 문화재 발굴 조사 결과, 3곳의 집수시설과 10곳의 건물터, 1곳의 제사유적 등이 확인됐다.

계양산성이 문헌에 드러난 기록은 1530년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으면 된다.

해당 문헌에는 "돌로 만들어진 산성인 계양산성은 그 둘레가 1천937척에 달하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져 고성(古城)으로 불린다"고 기록됐다. 

이 밖에도 17세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지」와 대한제국기에 쓰여진 「증보문헌비고」 등에도 "삼국시대에 쌓았으나 사용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삼국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계양산성은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산성의 기능이 상실됐고, 무너지고 방치된 채 오랜 세월 옛 산성터로 남겨졌다. 일제시대에 계양산성과 그 일대는 공동묘지가 들어서기도 했다. 

# 계양산성의 보존과 미래 

계양산성은 1992년 인천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면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근거 자료의 부족으로 특별한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0년 계양산성에 대한 복원 정비 계획이 수립되면서 산성의 보존과 관리, 학술조사 추진 등의 마스터플랜이 마련됐다. 세월 속에 잊혀진 계양산성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셈이다. 

수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의 목간과 토기, 기와 등의 유물이 빛을 보게 됐고 산성을 뒤덮었던 무덤들은 모두 이장해 정비됐다. 

2020년에는 시대별 성곽 양식 연구 유적으로의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기도 했다. 

계양산성은 역사의 숨결과 자연의 정취를 동시에 품어 도시민들에게 위안을 준다. 계양산성 둘레길은 물론이거니와 계양산성에 접근하는 길도 말끔히 정비됐다. 특히 일반인은 물론 장애인까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계양산성을 방문하게끔 ‘무장애길’도 조성됐다.

자연과 유적이 어우러진 계양산성은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고 코로나19로 지친 지역주민들에게 커다란 안식을 주는 힐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오늘도 묵묵히 수행한다.

우제성 기자 godok@kihoilbo.co.kr

사진=<인천 계양구 제공>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