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미래지향의 시대를 살면서 왜 2천500년의 역사를 거슬러 공자를 거론하는가? 이는 낡은 사고방식, 구태의연한 과거의 의식으로 회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대답은 No다. 호학의 성인이자 진정한 인류의 스승인 그를 통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삶의 지혜를 구하는 것은 물론 영원한 인류의 고전 「논어」로부터 교육의 방식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능이나 사상 등을 열어 주고 피게 해 일깨워 주는 것을 계발(啓發)이라 한다. 이 단어는 공자의 독특한 교육 방법으로부터 시작됐다. 공자는 학생 스스로가 궁금한 걸 밝혀 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해 일깨워 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왜냐면 전전긍긍하지도 않는 학생에게 미리 가르쳐 봐야 조장(助長)만 될 뿐 크게 득 될 게 없기 때문이라 믿었다. 이는 송나라의 어리석은 농부가 ‘모를 억지로 뽑아 벼가 빨리 자라게 도와준다’는 「맹자」의 ‘발묘조장(拔苗助長)’에서 얻는 교훈과 맥락을 같이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배움을 키울 수 없다. 이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學而不思則罔)’는 것과 상통한다. 학생들은 질문하면서 이미 반을 배우고 대답을 들으면서 나머지 반을 익혀 학습이 완벽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를 가르쳐 주고 나머지 세 개는 스스로 알아서 찾는 자세가 보이지 않으면 공자는 제자를 다시 가르치지 않았다는 일화는 평소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사상으로 제자들의 배움에 포용력을 견지했던 공자조차 바로 이런 주도적인 배움의 열정을 우선시하는 차별화를 채택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교육에 무엇을 말하는가? 안타깝게도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천명(知天命) 정도의 나이가 돼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현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는 그야말로 초스피드 시대다. 따라서 무엇이 주체적인 삶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므로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것처럼 매일매일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지도 모른다. 결국 손님의 삶이 아닌 주인의 삶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할 것이다. 

고등학교는 2023년부터 연차적으로 고교학점제 운영으로 교육제도가 획기적으로 바뀌는 시점에 와 있다. 앞으로 제도상 문제점을 보다 보완해 나가면 학생들은 교과 선택의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 학생들의 고등학교에서의 삶을 잠시 돌아보자. 그들은 대학 진학을 선택할 때도,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도 주도적인 삶을 살아왔는가. 선택은 학생들 스스로 했을지 몰라도 시작과 끝은 부모와 형제, 교사와 성적이 아니었는가. 학생들은 과연 전공의 의미를 알고, 그 전공과 얼마나 친화적인 삶을 살았는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전공과 어색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닌가. 겉도는 전공 공부로 살았는데 회사에 입사해 재미있을 리가 있었을까. 하루 이틀이 아닌 몇 년, 아니 수십 년을 무거운 부담을 느끼며 업무를 처리하지는 않았는가. 이것이 과거 학생들의 삶의 모습으로 항상 스트레스와 친구가 돼 불행하게 살아온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 학생들이 살아갈 삶은 달라져야 한다. 이는 밀려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밀고 가는 삶으로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즉, 표류하듯 떠밀려 가기보다 가고 싶은 곳으로 항해하는 삶이어야 한다. 또 가는 길에 얻어 타고 가는 히치하이크가 아니라 스스로 가고 싶은 곳을 운전해 드라이브를 즐기는 삶이어야 한다. 나아가 주입식 교육과 조직에 순응하는 체득된 습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간절한 꿈을 갖고 분명한 비전이 있는 삶이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계발(自己啓發)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학생들에게 간절함을 갖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자기계발이 가능하고, 그것은 곧 주체적인 삶으로 연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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