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재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정연재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초인간적 운명 ‘포르투나(fortuna)’와 인간의 역량 ‘비르투(virtu)’는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관통하는 핵심어다. 인간의 의지나 능력으로 통제하기 힘든 외적 조건이 포르투나라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 비르투다. 마키아벨리는 이 두 개념을 상정하면서 당시 지식인 사회에 팽배한 운명론과 과감히 결별한다. 우리 삶에 미치는 포르투나의 영향력은 절반을 넘지 못하며, 나머지 절반은 인간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운명은 그것을 장악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인간에게 가혹할 정도로 복수하지만, 운명을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자에게는 큰 성취를 선물로 가져다준다. 운명에 과감하게 도전하기 위해 역량을 갖추는 것만이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가능한 최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새 정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 검증이 진행 중이다. 각종 논란 가운데 이번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부모 찬스’다. 운명과 능력의 절묘한 결합을 강조했던 마키아벨리의 시각에서 보면 운을 인간의 통제권 안으로 포섭해 내는 탁월한 기술 앞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장관 후보자의 도덕성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수준은 고사하고 일반인 수준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 전문직의 도덕적 퇴락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준다. 

주지하다시피 전문직을 의미하는 영어 프로페션(profession)은 공적 선언(public declaration)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professio에서 나왔다. 특히 전문직은 이론적 지식에 기초한 기술, 전문직 연합체, 광범위한 교육 연한, 자격 테스트, 노동의 자율성, 자기 규제, 공적 서비스, 높은 지위와 보상 등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학자 다니엘 벨(D. Bell)이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으로 주목한 전문기술직의 부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 기능의 급속한 전문화가 우리 사회의 구조 변동을 이끄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전문직 양성을 목표로 하는 제도적 기반으로서의 전문 교육기관 역시 오랫동안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전문직은 대체 불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유로 상당한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누려 왔지만, 이제 그 특권 자체가 급속도로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전문직 황혼기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전문직의 황혼기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전문직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로페셔널리즘은 전문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축으로 하는 일련의 가치다. 그러나 최근의 전문직을 둘러싼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직무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는 점에서 ‘손상된’ 프로페셔널리즘의 징후를 보여 주고 있다. 이윤 창출을 최대 목표로 하는 영리 법인에 소속된 전문직이 직무상 자율성과 전문적 통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바로 기술 변화로 인한 전문직 실천의 극소화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전문직 실천에 큰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독립과 자율성에 기반한 전통적 프로페셔널리즘을 해체하고 탈전문주의화를 앞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전통적 테일러리즘(Taylorism)이 노동자의 지식과 숙련기술을 분리·제거해 노동자의 행위양식을 통제하는 관리체계라 한다면, 인공지능시대의 테일러리즘은 전문직의 지식과 숙련기술의 많은 부분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게 함으로써 극소수의 전문직만이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는 시스템이다. 사회적 영향력과 경제적 특권의 핵심을 이뤘던 ‘전문성’이 최소화됨에 따라 전문직 자체의 급격한 해체가 예상되는 것이다. 

전문직의 정체성과 위상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시대에 전문직은 철저한 자기 갱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전문직의 독점적 지위는 자기 이익과 결별해 공공선을 위한 노력 가운데서 빛을 발할 수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전문직 황혼기 시대에 실천적 지혜를 갖춘 교육받은 전문직(educated profession)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