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상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박병상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늦은 가을이면 넓은 잎사귀를 떨어뜨리며 늦은 시간 귀가하는 중년의 마음을 쓸쓸하게 맞아 주던 양버즘나무가 이맘때 전혀 그늘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울지 모르는데, 벌써 답답해진다. 초여름이면 가지마다 잎사귀를 무성하게 펼치며 여름철의 햇볕을 차단해 주던 도시의 오랜 가로수였는데, 줄기에 곰팡이를 달면서 맥을 추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년 이맘때 닭발처럼 잔혹하게 가지를 잘라낸 ‘강전정’ 때문일까? 이러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맥없이 쓰러지는 건 아닐까?

연수구청 근처, 자동차 소음 심하던 아파트에 살다 2년 전 앵고개 넘어 조용한 소암마을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코로나19 이후 시내버스 배차 간격이 늘어도 지하철역까지 흔쾌히 걸었다. 하루 만보걷기를 실천하려고 승용차를 없앴기에 대중교통이 불편하더라도 감당했던 것인데, 작년 여름은 고됐다. 무참하게 가지를 잃은 가로수가 잎사귀를 전혀 펼치지 못해 뙤약볕을 피하지 못한 건데, 계속되는 강전정은 끔찍했나 보다. 가지 잃고 곰팡이까지 앉은 나무의 드문드문 잎사귀는 애처롭다.

갯벌에서 조개 캐던 주민 터전을 밀어낸 소암마을의 아파트 단지에 만개하던 이팝나무는 흐드러졌던 꽃잎을 요즘 속절없이 떨어뜨린다. 흰쌀밥을 잎사귀 위에 엎은 듯 꽃잎이 소담하던 이팝나무는 미화원의 수고 덕분에 이면도로를 수놓지만, 그늘을 거의 만들지 못한다. 뙤약볕 아래 걸으며 그늘이 필요한 시민은 땀을 흘려야 한다. 플라타너스라 부르기도 하는 양버즘나무라면 그늘 사이로 시원한 바람을 끌어들일 텐데.

지방자치단체의 일상적 행정을 짐작하지 못하는데, 가로수 전정은 누가 결정하는 걸까? 닭발을 거꾸로 꽂아 놓은 것처럼 볼썽사나운 양버즘나무는 연수구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인천 곳곳, 아니 전국 지자체가 관리하는 가로수마다 처참한가 보다. 참다못한 환경단체가 ‘가로수시민연대’를 결성해 민원을 제기하며 인터넷의 SNS 공간을 달군다. 어제오늘의 행동이 아닌데, 자치단체장은 왜 강전정을 방치했을까? 몰랐을까? 매연가스를 불편해하는 구민에게 많은 자치단체장은 ‘바람길’ 조성을 약속했다. 하지만 양버즘나무와 더불어 바람골은 사망했다.

환경단체의 민원과 행동이 얼마나 거셌는지, 최근 환경부는 ‘삭발식 가로수 가지치기’를 제한할 지침을 올해 안에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가로수가 생물다양성 증진에 중요 역할’을 하므로 그에 맞는 지침을 지자체에 전할 모양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다행인데, 가로수 전정이 불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표준협회는 25% 미만의 전정을 권장한다는데, 우리가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관행으로 전정을 사업자에 맡겼고, 지자체는 항의 목소리를 외면했거나 듣지 못했겠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작은 도시 비스바덴은 양버즘나무 가로수 터널로 유명하다. 넓은 보행자도로를 이중으로 감싸는 양버즘나무를 시에서 체계적으로 전정하자 터널 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주말이면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 된다. 비스바덴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서울 대학로의 방송대학 앞 보행자도로는 건강하게 자라 오른 양버즘나무 가로수가 시민들을 불러들인다. 양버즘나무는 인천이 유명하다. 자유공원의 양버즘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곧 공원으로 단장될 캠프 마켓 부지의 양버즘나무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한동안 두툼한 빙하에 뒤집혔던 유럽은 수종이 다양하지 않다. 빙하에 덮인 적 없는 우리와 달리 주변에 생물이 다채로운 산록이 거의 없다. 그렇더라도 시 여기저기 공간에 다양한 나무로 숲을 조성하고, 숲 사이에 가로수를 건강하게 심어 녹지를 연결한다. 동물은 물론 식물이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조성한 이른바 ‘녹지축’이다. "자연생태계의 건강성은 생물다양성 증진에 따라 좌우된다"라고 강조한 환경부 자연생태정책과장은 생물다양성이 증진될 수 있도록 가로수를 작은 생태공간으로 가꾸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지자체가 얼마나 호응할까?

지금까지 무심했더라도, 새로 출범하는 지자체는 바싹 신경 쓸까? 기후위기로 해마다 더위는 심각해진다. 인천도 예외가 아닌데, 지쳐 가는 시민에게 바람골이라도 선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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