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처인성 둘레길을 따라 산책하는 인근 지역 노인들.
용인 처인성 둘레길을 따라 산책하는 인근 지역 노인들.

‘특례시’는 일반시와 달리 조직·재정·인사·도시계획 등 자치행정과 재정 분야에서 폭넓은 재량권과 특례가 인정되는 새로운 형태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지난 1월 13일 전국에서 인구 100만 명 이상의 4개 도시에 이 명칭이 부여됐다.

그 중 한 곳이 용인특례시다. 1996년 군에서 시로 승격된 이후 26년 만의 변화다. 시는 특례시라는 새로운 도시 브랜드와 반도체산업의 전략적 육성으로 지속가능한 친환경 경제자족도시로 도약할 계획이다.

발전을 거듭하는 용인특례시의 ‘용인’이란 지명이 사용된 시기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태종 때인 1414년 용구현(현 구성 일원)과 처인현(남사면 일원)을 합쳐 용인현으로 명명됐다.

처인성 전투 기록화.사진=전쟁박물관 제공
처인성 전투 기록화.사진=전쟁박물관 제공

# ‘용인’ 지명 토대…처인성 전투

이 같은 지명이 사용된 데는 고려 후기 승장(僧將) 김윤후와 처인성이 중심에 자리한다.

13세기 초는 아시아 북방 초원에 위치한 몽골이 정복 전쟁을 일으켰던 때다. 당시 몽골에 쫓긴 거란족 일부가 고려를 침입했고, 고려는 몽골의 힘을 빌려 이들을 물리쳤는데 결국 화근이 됐다.

몽골은 고려에 조공을 독촉했고,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서 몽골로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몽골은 이를 핑계로 1231년 고려를 침공했다. 몽골의 1차 침략 이후 30여 년간 6차례에 걸쳐 전쟁은 이어졌다.

몽골이 6차례의 침략 중 전투에서 패배해 고려에서 철수한 횟수는 2차례다. 몽골에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곳이 바로 처인성(2차 침략)이다. 두 번째는 5차 침략 때로 충주성 전투다. 두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수는 바로 김윤후다.

고려는 몽골의 1차 침략 이듬해인 1232년 강화천도를 단행했다.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그러자 몽골은 즉시 2차 침략을 강행했다.

당시 몽골군을 이끈 살리타는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한 뒤 수주(水州·현재 수원)에 속했던 처인부곡 소성 처인성에 도달했다. 고려시대에는 일명 향, 소, 부곡(鄕所部曲)이라 해서 광업과 수공업에 종사한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처인성 아트플로어.
처인성 아트플로어.

살리타의 몽골 주력부대는 처인성을 포위해 공격했고, 부곡민들은 끝까지 항쟁했다. 이때 이들을 지휘한 장수가 김윤후다. 일찌감치 승려가 된 김윤후는 백현원(白峴院)에 있다가 이곳으로 피난 온 상태였다. 

특히 처인성 전투에선 적장 살리타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화살을 쏜 주인공은 김윤후 장군이라고 전해진다. 전 세계를 상대로 정복전쟁을 치르던 몽골 칭기즈칸군 중 유일하게 총사령관이 전사한 전투이기도 하다.

살리타가 사살된 처인성 북쪽 들판은 지금도 사장(射場)터로 불린다. 이후 김윤후와 승병, 부곡민은 장군을 잃고 사기가 떨어진 몽골군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로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됐고, 부곡민 신분도 상승했다. 김윤후는 상장군에 임명됐으나 끝내 사양해 섭량장이 됐다. 이후 처인현은 용인이란 지명이 생긴 토대가 됐다.

몽골은 3차 침략 때 패배를 안긴 처인성에 잔학한 보복을 했고, 결국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았다. 

처인성역사교육관.
처인성역사교육관.

# 800여 년 전 전투의 흔적…역사공원 조성

처인성은 13세기 이전인 신라 말이나 고려 초께 축조됐다고 추정된다. 시굴조사 과정에서 주름무늬병, 선조문 평기와, 당초문 암막새 기와 등 신라 말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출토된 사실을 근거로 삼았다.

현재는 처인구 남사읍 아곡리 마을 입구 해발 71m 정도 구릉의 끝부분에 평면이 마름모꼴 형태인 성벽으로 남았다. 성벽 규모는 둘레 약 400m이고, 높이 약 3∼7m다. 외벽은 35∼45도가량 경사를 이뤘다. 1979년 남서쪽 성벽 120m를 복원했고, 1980년 동·남·북쪽의 성벽 205m를 수리했다.

1977년에는 경기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고, 2년 뒤 처인성 승첩기념비도 준공됐다. 비문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최영희가 짓고, 글씨는 김기승이 썼다.

시는 이곳 일대 2만6천530㎡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했다. 2017년 착공해 2020년 6월 완료했다. 도비와 시비 16억 원을 투입해 둘레 탐방로를 조성하고 수목도 정비했다. 아트월, 아트플로어 등도 설치했다.

# 용인의 자긍심…후세에까지

처인성을 찾았다. 첫인상은 ‘성이 맞나’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낮은 구릉이었다. 토성은 다 이런가도 싶었고, 이곳에서 전투가 가능했나도 싶었다.

탐방로를 따라 올라가니 처인성 승첩기념비가 보였다. 맞은편엔 아트월이 있다. 모두 대몽항전에 대한 내용들로 빼곡했다.

탐방로 바닥엔 아트플로어가 10여 개 새겨졌다. 역시 처인부곡민과 승장 김윤후의 결사항전이 담긴 처인성 전투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다. 

탐방로를 따라 처인성을 돌며 아트플로어를 하나하나 읽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아트플로어를 읽으며 탐방로를 다 도는 데는 20분 정도면 충분했다. 처인성 둘레가 400m 정도니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엄마를 따라와 탐방로를 이리저리 뛰어노는 7살가량의 어린아이, 산책을 하는 노인도 보였다. 인근 주민에게 좋은 휴식공간이 된 셈이다.

처인성 옆에는 처인성 전투를 생생하게 만나게 되는 ‘역사교육관’이 자리했다. 2020년 9월 건축에 들어가 지난 4월 12일 개관했다. 대지면적 4천369㎡에 지하 1층·지상 2층, 건축총면적 999.64㎡ 규모다. 1층에는 상설전시실과 체험실, 2층에는 다목적실이 조성됐다. 체험실에서는 처인성 블록 쌓기와 스케치 등의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역사교육관 내 디오라마.
역사교육관 내 디오라마.

특히 상설전시실은 신기술을 도입해 국내 최초로 기둥 없이 탁 트인 공간(폭 14m, 높이 10m)으로 구현했다. 앞서 용인시·명지대학교 산학협력단이 2017년 4월 국토교통부 ‘10m 대공간 한옥설계시공 기술개발 공모사업’에서 뽑힌 기술이기도 하다.

상설전시실에선 홀로그램과 그래픽 등을 통해 처인성 전투를 생생하게 체험 가능하다. 몽골 제국의 설명과 전투 방식, 1·2차 침략을 비롯해 부곡제도와 승장 김윤후에 대한 설명, 처인성 전투의 중요성 등으로 나뉜다. 메인은 전시실 중앙에 배치된 디오라마로 재현된 처인성 전투를 보게 된다.

‘용인 처인성역사교육관’은 개관한 지 한 달 만에 누적 방문객이 1만 명을 돌파하는 등 인기를 끈다. 개관 이후 휴관일인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평일 하루 평균 약 100명, 주말 하루 약 480명이 다녀갔다고 집계됐다. 어린이날 행사가 진행된 5월 5일에는 1천300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았다.

용인 처인성역사교육관은 휴관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 가능하다. 관람료는 무료다.

지난 4월 19일에는 처인구 남사읍 주민자치센터에서 ‘처인성 기념사업회’도 창립했다. 용인시민 1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행사엔 백군기 용인시장, 심언택 용인문화원장, 용인시 불교사암연합회 법경 스님, 주상봉 용인시불교전통문화보존회장, 발기인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앞으로 처인성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용인시민의 자존심을 되찾는 의미로 학술적 연구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날 발기인들은 초대 기념사업회장으로 남기화 용인시 게이트볼회장을 선출했다.

남기화 초대 회장은 "처인성은 대한민국의 반만 년 역사를 지탱하게 한 저력과 민족적 자긍심의 상징인 만큼 기념사업회를 통해 국난 극복의 상징인 처인성의 가치와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용인=안경환 기자 jing@kihoilbo.co.kr

사진=용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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