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에서 활동하는 원로 조각가인 고정수 선생을 만났다. 구상조각계의 원로, 한국 돌 조각계의 오랜 전통을 계승한 전뢰진 선생의 제자다.

돌조각, 브론즈, 테라코타 등 질감을 살려내는 탁월한 능력으로 유명한 구상조각의 대가 고정수 조각가. 그의 인생 여정이 참으로 궁금했다.

"선생님 작업실은 어디에 있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고정수 선생은 "영감이 떠오르면 그곳이 바로 작업실입니다. 그 자리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제가 있는 현장이 곧 작업실이죠. 심지어 꿈에서 얻은 영감을 기억을 더듬어 작품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기자가 방문한 그의 갤러리 겸 작업실은 야외는 물론 보일러실과 욕실 등 곳곳에 작업을 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고정수 선생은 기자에게 작업공간을 소개하며 "자신이 지금까지 만든 작품 모두가 소중하지만 작업실 한편에 소중히 간직해 온 원형들이 작가로서 갖는 자부심이며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인천 출신 원로조각가 고정수 선생이 곰을 의인화한 작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인천 출신 원로조각가 고정수 선생이 곰을 의인화한 작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 인천은 제1고향, 양평은 제2고향

고정수 선생은 "태어나 자란 곳은 멋진 항구도시 인천이지만, 20년 가까이 양평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전업 조각가로 살아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미술반 특별활동을 하며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 공장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화재사고 탓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가난하고 힘든 삶이 시작됐다.

대학 진학을 원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과 부모의 권유로 인천공고 건축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흥미를 잃었다. 때문에 2학년 재학 중 인문계 고등학교인 인천남고로 전학했다.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꾼 송덕빈 미술선생님을 만나 미술반 활동을 다시 시작하며 잃어버린 예술가로서의 꿈도 다시 꾸게 됐다.

고 선생의 대표작들.
고 선생의 대표작들.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송덕빈 미술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아 당당히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28세에는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가 되는 영광도 찾아왔다.

이후 교수와 겸업작가로서는 꽤나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잡은 전업작가의 길을 포기하기 어려워 14년 동안 근무한 조선대학교를 떠나 41세 되던 해에 안산에서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61세에는 양평에 둥지를 틀고 현재까지 작품활동을 한다. 지금도 변함없이 제1고향과 제2고향을 오가며 인천조각회, 동창회, 양평군립미술관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

# 롤모델은 전뢰진 선생과 프란시스코 소니가

고정수 선생은 해외 작가 중 코스타리카 태생으로 멕시코에서 주로 활동한 프란시스코 소니가라는 작가를 늘 기억한다.

소니가는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다. 연애 시절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그의 아내는 모델로 작품활동을 했다. 중남미 문화를 담아내는 작가로 잘 알려졌다.

또 국내 작가로는 홍익대 은사인 전뢰진 조각가를 존경한다. 그는 전뢰진 선생의 명성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존경하고 멋스럽게 여긴다. 우리나라 곳곳이 그분의 박물관이고 전시장이라 할 정도로 조각 분야의 전설이자 대가다. 그는 전뢰진 선생의 당당함을 사랑한다. 90세가 넘었음에도 여전히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친다고 그는 전했다.

고 작가의 대표작들.
고 작가의 대표작들.

# 여체 작업에 몰두하다

고정수 선생의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지만, 등록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컸다고 한다. 고 선생은 지금도 한숨을 내쉬며 전전긍긍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교통사고를 당한 어머니의 치료비와 합의금으로 등록금을 대신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교통사고로 인해 어머니는 20여 년을 불편한 몸으로 사셨지만,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고 선생을 뒷바라지하는 대한민국 어머니의 위대한 모성을 고스란히 보여 줬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살았기 때문인지 작가로서 어머니의 헌신과 인내, 푸근함 등 모성에 대한 특별함을 갖게 됐다. 또 오랜 세월 모진 풍파를 견디며 희생하고 헌신하며 포용한 대지를 품는 여인상, 모성이 한국 여성미의 본질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 여체 작업에 이어 ‘곰’ 조각가로

우연한 기회에 세종시에 위치한 베어트리 파크에 갈 기회가 있어 그곳에서 반달곰 150마리를 키우던 모 회장을 만났다.

고 선생은 그분의 요청으로 공원 전체에 조각 작품을 설치하는 일을 맡게 됐고, 이후 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곰은 어머니의 모성과 가족애와 상당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여성상과 자매상뿐 아니라 곰을 테마로 작품활동을 펼쳤다. 곰의 인내심과 끈기가 모성과 한국적 여인상, 강인함 등과 닮은꼴이라고 여긴 점이 곰 시리즈 작품에 몰두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곰을 의인화한 가족상에 이어 에어벌룬 작품도 선보였다.

고정수 작가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고정수 작가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 자매시리즈

고 선생은 첫 개인전을 조선대 미대 교수 재직 시절인 1983년에 열었다. 개인전의 상징이라 할 작품으로 당시 온 국민을 눈물바다로 몰아넣은 KBS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두 자매가 극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을 담아낸 ‘자매시리즈’를 선보인다.

해당 작품이 장안에 화제가 되며 스타 작가로서 첫출발을 하게 됐다. 자매시리즈 작품은 이후 조선대학교와 KBS의 도움으로 현재 여의도광장(만남의광장)에 전시됐다.

지금까지 탄생한 작품들은 고 선생에게는 자식과 같은 존재다. 작품들과 항상 대화를 나누며 소통의 시간을 마련한다.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헤어짐이 예견되지만, 미술관 전시는 헤어짐이 없다. 모든 작품이 사랑스럽지만 자매상 작품에 특히 강한 애착을 느낀다.

# 미대 입학은 인생 최고의 선택

그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미술대학에 입학한 일을 인생 최고의 선택으로 꼽는다. 부모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선택한 일이기에 결코 후회는 없다.

그 다음으로 잘한 선택은 조선대 미대 교수라는 겸업작가에서 과감히 벗어나 불규칙한 수입으로 살더라도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온 인생이라고 말한다. 부인의 독려와 응원도 큰 힘이 됐다.

고 선생은 "미대 교수직을 내려놓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내에게 내 뜻을 전하자 흔쾌히 나의 결정을 존중해 줬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결정적인 후원이었던 셈"이라고 했다.

고 선생의 인생뿐만 아니라 어떠한 인생을 살든 세상의 모진 풍파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일은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터다.

# 아트로드 프로젝트

고 선생은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하고, 마치 일기를 쓰듯이 작품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양평에 15년가량 거주한 그는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싶다.

특히 국내외 어느 도시 못지않게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양평군 강상면과 강하면 일대에 수도권을 대표하는 아트로드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지역사회에 거주하거나 양평에서 활동한 여러 예술가들과 틈틈이 소통하며 착실하게 준비 중이다.

# 후학 위해 초석 되고파

그는 국민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삶 자체가 드라마인 듯싶다. 우리 민족은 수없이 많은 외침을 이겨 낸 저력을 바탕으로 코로나19가 창궐했어도 결국 이겨 내지 않는가.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반드시 이겨 내리라 믿는다. 인내심을 갖고 이겨 내야 한다. 후학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정책적 기반을 만들어 초석이 되고 싶다. 예술가들은 힘들다. 작품활동을 위해 투잡을 하는 후배 예술가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인터뷰를 마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감이 떠오르면 그곳이 바로 작업실입니다"라는 고정수 선생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양평=안유신 기자 ays@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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