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요즘 학교에선 과거처럼 마음 놓고 가벼운 농담을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소위 ‘학생 인권’과 ‘교권’이 상반돼 대결의 양상을 띨 뿐만 아니라 ‘성인지 감수성’과 ‘아동학대’, ‘노동인권’ 등의 문제로 갈등이 비등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근본에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상호 간 ‘마음의 눈금’이 너무도 작기 때문이다. 예컨대 직장이든 학교든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말을 1에서 10까지 척도를 매길 때 3정도로 예상하는 것이 9만큼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는 반대로 8정도의 칭찬을 예상하는 데 2정도밖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처럼 상대가 예상과 너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참으로 당황스럽고 난감하다. 이 모두가 ‘마음의 눈금’이 적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어떤 기사나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자. 거의 이분법적인 반응에 익숙하다. 소위 ‘좋아요’와 ‘싫어요’이거나 ‘찬성’과 ‘반대’로 분류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나아가 상대방의 말에 마음의 눈금을 확대해 볼 수 있다. 예컨대 ‘매우 좋다’, ‘대체로 좋다’, ‘약간 좋다’, ‘보통이다’, ‘약간 아니다’, ‘대체로 아니다’, ‘전혀 아니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처럼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판단으로 상대방의 말에 대한 느낌과 소감을 밝힐 수 있다. 이렇게 선택지가 2개, 5개, 7개로 나뉘는 것을 ‘리커트 척도’라 부른다. 이는 랜시스 리커트(Rensis Likert)라는 사회심리학자가 개발한 태도 측정법이다. 물론 여기엔 학계에서의 일부 반대도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한 결과 일반적인 성인의 마음에는 7개 정도의 마음의 눈금이 있다고 한다(김경일, 2022).

초·중·고 학생들은 그들의 연령대에 맞는 마음의 눈금이 존재한다. 대개는 ‘좋아요(찬성)’와 ‘나빠요(반대)’ 2개의 눈금이 그것이다. 이들이 대학생으로 성장하면 7개의 서로 다른 반응이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는 마음의 눈금도 성장·발전하거나 진화해 자신의 마음을 세심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청소년의 경우 어떤 영역에선 2개의 눈금만 존재하나 어떤 영역에서는 10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교육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교사는 청소년 감정의 경우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열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기에 청소년을 대하는 교사의 언어와 태도는 거기에 맞춰 다양해야 한다. 

교사가 마음의 눈금을 확장한다는 것은 인생이 더욱 성숙해진다는 의미다. 즉, 성숙해진다는 것은 마음의 눈금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할 것이다. 교사는 정해진 틀의 그릇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는 일정한 틀에 맞춰 마음의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학생들의 행동이 마음에 거슬릴 때도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학생들의 일탈 행동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며 대화와 상담, 그리고 사랑으로 얼마든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교육에 임하는 것이다.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학생을 버젓이 허용하는 것은 대한민국 교육의 수치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엔 반드시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즉,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과 이를 수용하여 바로잡는 대책이 함께 필요하다. 이는 크게는 사회적·교육적 제도의 혁신으로 접근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교사의 마음의 크기에 따라 개선하거나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현직 교육자의 오랜 경험에서 바라본, 비록 단순하지만 실천 가능성이 높은 처방책은 이렇다. 그것은 바로 교사는 일정한 모양만을 빚어내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사의 마음의 눈금, 즉 마음의 크기는 청소년 교육의 성패를 좌우할 소중한 방책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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