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에게 세 개의 산이 그려진 풍경화를 보여 주고 물었습니다.
"얘야, 뭐가 보이니?"
"왼쪽에는 큰 산, 중앙에는 중간 크기의 산, 그리고 오른쪽에는 작은 산이 보여요."
"이번엔 네가 왼쪽의 큰 산에 올라갔다고 상상해 보아라. 그 위에서 본다면 뭐가 보일까?"
"왼쪽에는 큰 산, 중앙에는 중간 크기의 산, 그리고 오른쪽에는 작은 산이 보여요."
자신이 가장 높은 왼쪽 산에 올라가서 바라봤다면 두 개의 작은 산이 보인다고 대답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머릿속으로 이미 결정해 놓은 과거 관점으로 말했던 겁니다. 이것은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발달심리학자인 장 피아제가 밝힌 유명한 실험으로, 이 실험을 통해 자기중심주의가 우리를 어떤 착각에 빠뜨리게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심리학, 나 좀 구해줘」라는 책의 저자인 폴커 키츠는 이 실험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잊지 않고 전합니다.
"자기중심주의의 반대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함께 나누는 ‘공감(empathy)’이다. 사랑이 실패로 끝나는 가장 큰 이유는 상대를 배려하는 공감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방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입장만을 고집하면서 다툼은 시작된다.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는 걸 상대가 들어줘야 한다고 여기는 남녀는 끝내 헤어지고 만다. 이처럼 자기중심주의를 계속 고집하면 평생 어린애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평생 함께하고 싶다면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상대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라.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껴 보는 거다. 그러면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다. 상상으로라도 상대 입장이 돼 보자.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왜 그가 내게 서운해하는지를."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또는 관계가 친밀할수록 자기중심주의는 쉽게 작동됩니다. 그래서 함부로 상대를 대하고, 그 결과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가장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겁니다.
자기중심주의는 늘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이나 상대방을 판단하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어느 유머 관련 책에서 읽은 글 하나가 떠오릅니다. 길을 물었을 때 사람들의 답변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직업이나 기호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술집을 자주 다니는 사람의 답변은 "저 모퉁이에 호프집 있죠?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됩니다"라고 하고, 목사님은 "저기 교회 보이죠?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세요"라고 한답니다. ‘+’가 무슨 표시냐고 물으면 수학 선생님은 덧셈 부호라고 말하지만, 목사님은 십자가라고 하고, 약사는 녹십자의 상징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주의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배려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논어」에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배려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인 자공이 공자에게 "제가 평생 실천할 수 있는 한마디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공자는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타인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줬습니다.
그렇습니다. 배려는 곧 공감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위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배려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움츠리고 있던 자존감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려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상대의 아픔을 그 사람의 처지에서 헤아려 보는 것, 그리고 그가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하는 것이 공감입니다. 그것이 인(仁), 즉 사랑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때 너와 나 모두의 마음속은 기쁨과 행복감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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