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효림 서울시립대신문 편집국장
채효림 서울시립대신문 편집국장

이전 칼럼에서 철학 수업을 통해 배운 ‘무지의 지’를 언급했었다. 글의 논지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열린 자세로 타인의 생각을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나와 다른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말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며 양다리를 걸치는 양시론이 바람직하다는 뜻이 아니다. 철학 수업에서 열린 자세만큼이나 강조됐던 개념은 ‘일관성’이다. 한 주제에 대해 존재하는 여러 철학자의 주장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모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그릇된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규정하는 도덕의 기준에 대해 칸트는 인간이 지켜야 할 당연한 규범이 존재하며 선한 의지에 따라 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꾀하는 행위가 곧 도덕적인 것이라고 정의했다. 둘의 말이 모두 맞다면 칸트의 입장에서 거짓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행위다. 한편 벤담의 입장에서는 거짓말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행복을 누린다면 옳은 행위가 되므로 서로 충돌하게 된다.

삼가재상, 다투던 두 하녀의 말이 모두 옳다고 말해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는 부인의 말까지 일리가 있다며 세 명의 주장이 전부 맞다고 인정한 황희 정승식 논리는 철학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수는 없다. 일관적이지 않은 이들은 소위 ‘내로남불’이라는 말로 비판받기 일쑤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정’에 민감하다는 MZ세대의 모순적 태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관성이 성립하려면 어떤 환경에서도 같은 기준을 고수해야 한다. 그러나 MZ세대를 보고 있자면 자신에게 유리하면 눈감고 불리하면 분노하는 아전인수식 태도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강의가 보편화되면서 대면 강의와 같은 수준의 수업이 어렵다고 판단한 대학가는 완화된 상대평가를 시행했다. 높은 성적을 받는 기준을 낮춰 보다 쉽게 좋은 성적을 받게끔 함으로써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대면 강의가 부활했음에도 완화된 상대평가를 유지하는 대학이 존재하자 타 대학 학생들 역시 완화된 상대평가를 요구했다. 높은 성적의 기준이 낮춰지면 다른 노력을 들였음에도 똑같이 높은 성적을 받게 되는 불공정한 상황이 발생하기 쉽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부 학생만이 지인이나 매매를 통해 얻는 족보도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수강 신청을 못한 학생들이 돈으로 강의를 사고파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2019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조국 사태’에 MZ세대들은 얼마나 분노했는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주요 서울권 대학에서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집회를 통해 불공정을 책망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들의 요구에 답하듯 문 정권의 불공정함을 꼬집으며 대선 기간 ‘공정’과 ‘상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고 당선됐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현재 장관 후보자로 거론되거나 임명된 한동훈, 나경원 등의 주요 인사들에게도 투기, 입시 비리 등 갖은 불공정 논란이 제기되고 있으나 대학가는 일말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이쯤에서 살펴보자면 MZ세대가 과연 공정을 특별하게 중요시하는 세대가 맞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들 세대에 속하는 나조차 내가 언제부터 엄격하게 공정을 따졌는지 알 수 없다. 나 역시 완화된 상대평가에 환호하고 어쩌다 얻게 된 족보에 의지해 게으름을 피웠던 것을 보면 공정에 민감하다고는 떳떳하게 말하기 어렵다. 2030세대는 언제나 타 세대에게 규정당해 왔다. X세대, Y세대 등…. 이들은 기성세대에 의해 이름 붙여지고 풀이됐다. 어쩌면 MZ세대 역시 그들이 공정을 중시한다고 정의한 기성세대에게 이용당한 것은 아닐지 의심하게 된다.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 MZ세대를 규정하고 그들의 행동을 유도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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