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시인 천상병은 평생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천진무구함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무욕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산 그는 행복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우연히 그의 시 ‘행복’을 접했을 때 이 일 저 일에 짜증을 내며 살아온 저 자신이 들켜버린 것 같아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함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궁핍한 삶이지만 그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을 누렸습니다. "나는 어떤가? 그가 말하는 대로 생활비, 직업, 아내, 집, 막걸리 등이 상징하는 행복의 조건 중에서 부족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고 자문해 봤습니다.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며 살고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탐욕 때문에 늙어 가고, 분노 때문에 병들어 가며, 어리석음 때문에 죽어 가니 이 세 가지를 없애면 열반을 얻으리라"라고 법구경은 가르쳐 줍니다. 굳이 열반까지는 아니더라도, 탐욕이 나의 눈을 가려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하고, 분노가 폭언과 폭력으로 이어져 관계의 균형을 깨뜨리게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탐욕과 분노가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 끝에 조르디 쿠아드박이 쓴 「행복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에 나오는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큰 산 아래 평화롭게 살아가는 석공이 있었습니다. 암벽에서 돌을 떼어내는 일을 하는데, 주문받은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어느 부잣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호화 저택과 고운 비단옷들과 우아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눈부신 세계가 아른거려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내 인생이 시시해졌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산신령에게 간절히 기도하자 산신령은 "너는 이제 부자가 되고 행복해질 거다"라고 말해 줬고, 그는 부유한 상인이 됐습니다. 금장식에 둘러싸인 가마를 타고 머리를 조아리는 군중 사이를 지나가는 왕을 보기 전까지는요.

"왕이 되면 더 행복해질 겁니다"라고 다시 간절한 기도를 했고, 그는 왕이 됐습니다. 더 행복했습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그의 나라에 내리쬐기 전까지는요.

"태양이 왕보다 더 강력한데, 돈과 권력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태양이 되게 해 주십시오." 태양이 된 그는 기뻤습니다. 태양은 부자와 빈자, 약자와 강자, 식물과 동물, 만물이 소생하는 모든 곳에 빛과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바짝 메말라 갔습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니까요. 그러나 자신이 내뿜는 열기에도 꿈쩍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산을 보자 화가 났습니다.

"모든 걸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이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산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제 그는 영원불변의 산이 됐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무언가 자신의 발을 간질이고 있다고 느끼기 전까지만요. 간질이고 있던 것은 바로 저 아래에서 집을 짓는 데 쓰일 바위를 깨는 데 열중하는 보잘것없는 석공이었습니다.

천상병 시인과 조르디 쿠아드박의 행복론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이미 행복이 자리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른 채 밖에서 찾으려 하니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기지개를 켜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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