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자 서해안 칼럼인 ‘소통·무통·불통’의 후속판이다. 잘 나가다 뜬끔없이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마무리했으니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차렸으리라.

 다시금 이어가자면, 민선8기 신상진 성남시장실은 계획대로 헐레벌떡 시청사 4층에 마련됐다. 2층의 부시장실 등은 예산 수립과 전반적인 청사 공간 재배치에 따라 차후 시장실 옆(옛 체력단련실 주변)으로 올라온단다. 

 1∼3층은 시민 개방형 공간으로, 4∼9층은 업무용으로만 쓰겠단다. 그렇다면 3층에 위치한 기자실은 어떻게 됐나? 무성한 소문만 나돌다 폐쇄 후 아래층으로 이동해 브리핑룸 조성으로 가닥이 잡혔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일단 보류하는 쪽으로 결론 났다. 이 과정에서 3층 소규모 회의실을 이름만 브리핑룸으로 팻말만 바꿨다가 온전한 브리핑룸을 기대하던 몇몇(?) 기자가 반발하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추진 계획과는 전혀 다른,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다.

 기자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는 않는다. 그곳을 이용하든 안(못) 하든, 행정의 기본 절차인 의견 수렴조차 거치지 않은 일방통행은 기자실 폐쇄뿐 아니라 브리핑룸 신설의 명분을 잃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한마디 말도 없이 체력단련실과 문서고 등을 이전하고 들어선(서는) 시장실 이하 부속시설도 마찬가지다. 소통이 안 되니 경청(傾聽)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단 말이다. 리더(시장)는 경청을 넘어 겸청(兼聽)하는 자세가 필수 요건임을 앞서 언급한 이유도 이 점을 상기시키고자 함이다.

 기자의 말재주가 부족한 듯하니 중국 고전을 연달아 소환해 본다. 고대문명이던 BC 2000년께 황하에 홍수가 지속되자 치수(治水) 담당인 곤은 물이 흘러 나가지 못하게 벽을 쌓는 방법(도법)으로 막아 보려 했지만 실패해 처형당했고,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우는 물길을 막지 않고 흐르도록 해 바다로 보내는 방법(소법)으로 성공해 이후 하나라(하왕조)를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치수는 소통을 의미한다. 이어 BC 206년 초한 전쟁 당시 이기는 싸움에서 자신의 재주만 믿고 인재들을 소홀히 한 항우는 독단독행(獨斷獨行)으로 패배했고, 상대적으로 불리했던 유방은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는 군책군력(群策群力)으로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중국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당태종 이세민의 뒤에는 위징이라는 신하의 거침없는 ‘직언’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어 6대 왕 현종도 양귀비를 만나기 전까지 황제 의견에 동조하는 신하 소숭 대신 사사건건 황제에 맞선 한휴를 중용하면서 당나라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뤘다.

 공자의 제자 증자가 쓴 「효경(孝經)」에서도 "황제(皇帝)가 아무리 무능할지라도 쟁신(왕의 잘못을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 7명, 제후(諸侯)는 5명, 대부(大父)는 3명, 부모는 쟁우(친구)나 쟁자나 1명만 있으면 명예를 잃지 않는다"고 했다.

 사탕발림이든 쓴소리든 다양한 의견을 관심 있게 들으면 명군이 되고, 치우친 말만 들으면 어리석은 혼군이 된다는 겸청즉명(兼聽則明) 편신즉혼(偏信則昏)의 자세가 핵심 포인트다. 즉, 소통이나 경청, 겸청을 게을리하거나 업신여기면 자칫 민선8기가 갈피를 못 잡고 민심과는 다른 길로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중국 고전까지 빌려 구구절절 유창하게 인용했다만, 이쯤에서 마무리하련다. 더 이상 그분의 마음을 울릴 만한 고상한 말을 쓸 건덕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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