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희 시인
최영희 시인

앵무새는 관상용으로 기르는 새 종류 중 하나다. 원앙새 못지않게 다정한 사랑의 한 쌍으로 각인돼 있기도 하다. 앵무새의 종류는 다양하다. 머리에 왕관을 쓴 코카투 앵무새, 알록달록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금강앵무, 연둣빛의 아마존 앵무새, 빨강머리의 뉴기니아 앵무새 등 화려한 족보를 자랑한다.

우리는 그러한 아름다움보다 ‘사람 말을 잘 따라 하는 새’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가 주인에게 인사도 하고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한다며 무척 신기해한다. 모든 앵무새가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앵무새는 말을 잘한다고 알고 있다.

앵무새가 말을 잘하는 것은 혀의 구조가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작설(雀舌)이라고 하는 뾰족한 새의 혀 모양이 아니라 부드럽게 움직이는 혀를 가졌다고 한다. 복잡한 구조의 성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관계로 앵무새는 어려운 인간 언어를 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적 창의적으로 뇌에서 언어를 구성해 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들리는 소리를 레코딩하듯이 기억에 저장하고 영혼 없이 카피해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말소리뿐만 아니라 자동차 소리,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 동물 소리 등도 녹음기를 틀어 놓듯 그대로 복사해 낸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주인들이 나눴던 비밀스러운 말을 갑자기 흉내 내어 말하는 바람에 곤란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자연 세계는 참 재미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키는 대로 말하는 사람을 앵무새라고 비꼰다. 영혼과 철학이 없는 레코딩 버튼과 다름없다. 왜 그런 말을 해야 하는지, 그런 말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구조의 한 파편을 긁어대는 듯 읊어대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앵무새 노릇이 만연해졌다. 법망을 피하기 위해 모르쇠를 반복하거나 동문서답하듯이 자신의 입장만을 반복 주장하기도 한다. 경쟁 시대에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써먹는다. 합리적인 생각과 소신 있는 철학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논하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대화 해결법이 아니다. 무조건 우겨야 이긴다고 착각하는 불도저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선비의 나라였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먼저 생각하고, 잘못을 부정하고 우기기보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중요시하고 대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도덕과 윤리와 철학을 명분으로 중시했다. 배우고 익히는 학문은 문명의 발전 못지않게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삼아 왔다. 오늘날 사회현상을 지켜보자면 화가 치민다. 지식을 무기 삼아 변명하고 꼼수 부리는 폐단이 지나쳐 민심에 거슬리는 시대가 됐다. 언론을 이용해 변명과 선동의 시녀로 삼기도 한다. 사명감도, 책임감도, 양심도 헌신짝 버리듯 태연한 모습들은 실망을 넘어 자괴감이 들 정도다.

앵무새 노릇의 대표적 사례는 정치판인 듯하다. 정치를 하면 사람의 인격이 망가진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투쟁하고 승자가 돼야만 한다는 제국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론과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와 보편타당성 그리고 공감대를 갖는 합리적 방식은 사라졌다. 파벌의 권력과 이익을 앞세워 깡패 같다는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싸움·몸싸움을 서슴지 않는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심 없는 사명감과 책임감 있는 정치가 절실하다. 사익을 챙기고 권력만 행사하려는 사람들은 정치판을 떠나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실용과 이익만 앞세워 국가 정체성을 망각하고 영혼과 철학 없이 떠드는 앵무새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과 미래에 전개될 상황들을 예견해야 한다. 영혼과 철학을 되살리고 국가관과 도덕관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으로 요구되고 있다. 모두 각성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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