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몇 달 전 귀인에게서 팸플릿 하나를 받았다. 나의 시조평설집 「한글과 한자의 아름다운 동행」을 본 게 인연이 돼 만난 분이다. ‘한글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라는 홍보물이었는데, 속리산 법주사 신미대사 선양회가 2016년 펴낸 거였다. 그러잖아도 내 책이 시중에 나온 이후 관심을 가진 분들 중에는 신미대사에 관한 내용이 왜 없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책을 낼 당시 신미 관련 영화 ‘나랏말싸미’나 일부 관련 자료를 봤으나 여건상 넣지 못했다. 마침 졸저가 이즈음도 알음알음으로 읽혀지고 있어 증보개정판 발간 고려 차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그 팸플릿을 찬찬히 정독한 뒤 며칠 집중해 자료를 찾아봤다. 지난 10여 년 동안 훈민정음(한글의 본 명칭) 창제와 신미대사 관련 발표 자료가 상당함에 적이 놀랐다. 관련 학계, 특히 승려 업적 관련 사항인 만큼 불교계를 통한 내용이 많았다. 여러 권의 책(소설·에세이) 발간, 논문 발표, 방송 대담, 신문 보도 등으로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단독창제설이 통설이다. 여기 훈민정음 창제 및 보급에 대한 신미대사의 역할은 대개 4가지로 논점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직접 창제설, 둘째 창제·보급 주역설(또는 공동 창제설), 셋째 보급 조력설(창제는 안 했음), 넷째 창제·보급 전무설이다. 

창제든 보급이든 신미의 역할을 인정하는 학자로는 정광 교수, 강상원 박사, 학승 월성 스님 등을 꼽을 수 있다. 통설인 세종대왕 단독창제설을 인정하는 측은 당연히 이들의 주장을 부인하거나 반박한다. 이런 경우 이른바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럴 수 없다. 당시의 공인된 기록만 있어도 다행일 텐데, 애석하게도 약 600년 전의 일인데다 공인된 확실한 기록은 별로 없다. 

부인하는 측은 세종과 신미가 만난 때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라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든다. 반면 인정하는 측은 신미대사(속명 김수성)의 친동생 김수온이 쓴 「식어집」과 김씨 문중의 자료, 여러 불경 언해, 왕실과의 교류 같은 것을 근거로 든다. 그러면서 훈민정음의 범자(梵字, 산스크리트어) 모방 내지 기원설을 주장한다. 

나는 내 책에서 세종대왕 단독창제설과 가림토문자 모방설을 주장했다. 천지인 삼극원리와 발음기관을 본떴을 뿐만 아니라 28수 천문도와 음양오행의 원리가 들어 있으니 ‘창제’요, 글자꼴은 훈민정음 이전의 원시한글이었던 ‘언문’의 태곳적 모태글자 가림토문자를 베꼈으니 ‘모방’이다. 물론 세종은 당시 여러 나라 문자들을 참작하되 그 중 가장 닮은 문자(가림토)를 택했을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언급한 사항들에 대해 몇몇 상상적 추론을 해 본다. 신미대사의 주역설을 주장한 강상원 박사는 "우리말이 세계 언어 중 최고의 말이며, 실담어(悉曇語)의 뿌리가 됐다"고 했다. ‘실담어’는 6세기경 한자 음역 산스크리트어(범자)를 말한다. 가림토문자 38자는 약 4천200년 전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해 지었다고 한다. 가림토문자는 실담어보다 훨씬 이전의 문자이니 강 박사의 논리에 따르면 실담어의 모태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훈민정음 범자 모방설은 가까운 앞만 내다본 주장일 수 있다. 더 올라가면 범자의 모태어인 가림토문자 모방설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 신미대사의 조력도 있었던 것 같다. 한글의 세종대왕 단독창제설은 유효하되, 왕자들과 공주의 참여에다 외국어에 능통한 신미의 ‘음운학적 조력’이 있었을 수 있다. 더구나 조선 500년 숭유억불 시대, 당시 국문 아닌 한글을 불경 번역으로 보급한 신미와 불교계의 공로는 크나크다. 

끝으로 팸플릿에 언급된 안동 ‘광흥사 판각전’을 생각한다. 나는 그간 훈민정음해례본을 유생의 반발을 의식해 정음청 중심의 내부용으로 소량 인쇄·보급했을 것이라 했다. 어쩌면 지방에 판각전을 두고 불경 인쇄 시 내밀히 해례본도 인쇄, 인근 사찰 등에 분산 보급했지 않았나 싶다. 부디 완벽한 훈민정음해례본이 홀연 나오기를 고대한다. 시조 올린다.

- 은자의 침묵 -

 실록에 奸僧(간승)이래도
 여태 묻혀 견뎌온 건
 
 깨달음의 언어들로 
 나라 돕고 백성 살려
 
 머잖아 
 지구촌 속속곳 
 한글 세상 맞자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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