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고려는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게 됐다. 원은 고려의 동북지역에 쌍성총관부, 서북지역에 동녕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내정에 개입했고, 왕실 용어와 관제 등도 제후국에 해당되는 것으로 격하했으며, 고려 국왕과 원의 공주를 결혼시킴으로써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다. 이런 정치적인 문제 외에도 공녀(貢女)와 금, 은, 인삼, 잣, 매 등 각종 공물을 포함해 인적·물적으로 엄청난 수탈을 강요했다.

특히 공녀의 경우 「고려사」 세가에 충렬왕 1년(1275)에서 공민왕 4년(1355)에 이르기까지 50여 회에 걸쳐 176명의 공녀가 원나라에 바쳐졌다고 기록돼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공녀가 끌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에서 공녀를 요구하면 고려에서는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이라는 특별관청까지 설치해 원이 요구한 처녀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공녀를 선발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왕의 호위부대들이 민가를 뒤져 처녀의 징발에 힘을 쏟았다. 

공녀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처녀를 대상으로 했다. 원의 잦은 공녀 요구로 고려에서는 일시적으로 나라 안의 혼인을 금지하기도 하고, 금혼령이 내려지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써 열 살이 되면 혼인을 서두르는 조혼의 풍습이 생기게 됐다. 또한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기도 하고,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공녀의 선발은 조정의 명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외에도 고려에 파견된 원의 관료, 장군, 사신들조차 양가의 여인을 요구해 많은 고려의 여인들이 수난을 겪었다. 

공녀로 뽑혀 원에 끌려갈 때의 모습을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부모를 위시한 온 가족이 서로 모여 밤낮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성문에서 작별할 때는 서로 옷자락을 붙들고 엎어져 길을 막고 울부짖는가 하면 비통함과 분함을 이기지 못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 목매 죽는 사람, 실신하는 사람, 피눈물을 흘린 결과 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가 원나라에 공녀를 보내는 일은 1년에 두 번, 적게는 2년에 한 번꼴이었다. 한 번에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인은 대개 10명 정도였으나 많을 때는 40~50명이 되기도 했다. 원이 고려 여인을 요구한 목적은 궁인(宮人), 시첩(侍妾) 또는 몽골 상층부 사람들의 배우자를 구하는 데 있었으므로 얼굴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 가문도 중류 이상에서 처녀, 동녀(童女)를 요구했다. 충렬왕 이후 공민왕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에 왕래한 원나라 처녀 진공사신(進貢使臣)의 회수가 50여 회에 달해 기록 외에 엄청난 수의 공녀가 동원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원나라에 간 공녀들 가운데는 노비로 전락해서 저자에서 매매되기도 했지만, 몽골 사회의 상층부에서 황제·황후 및 귀족들의 궁인 또는 시녀로서 상당한 활약을 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공녀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기황후(奇皇后)다. 기황후의 가문은 한미했으나 고조 윤숙이 무예가 뛰어나 무인집권기에 고려 조정에 발탁돼 출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기 씨가 원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환관 고용보(高龍普) 등의 추천으로 원 순제(順帝)의 후궁이 됐고, 후에 순제의 제2황후로 책봉되면서 다시 기씨 가문이 등장하게 됐다.

공녀제도의 폐습은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에도 이어져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10여 차례 환관(宦官)과 함께 공녀를 요구했다. 한편, 공녀의 대부분이 원나라 황실의 궁녀가 되거나 고관들의 시중을 맡아 봤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고려의 생활양식이 널리 원나라에 퍼져 고려풍(高麗風)이 유행하게 됐다. 고려의 의복제도와 음식이 원나라 황실과 고관 내에 퍼져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기게 됐고, 고려만두·고려떡(高麗餠)·고려아청(高麗鴉靑) 등이 성행했다. 중국 문헌들도 복식, 음식, 풍속 등 몽골 풍습의 상당 부분이 고려에서 전래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7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K-POP 문화의 세계 전파나 다문화사회를 말하고 있지만 이미 ‘고려양’이라는 K-문화의 전파가 있었음을 역사 속에서 통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전파 과정에 국권을 잃은 고려 여인들의 서글픈 애환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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