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첫날인 9일 새벽,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무려 7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새 영국 총리를 임명하는 등 공적 책임을 다한 한결같은 근면함과 대중 친화적인 행보로 영연방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 온 여왕의 시대가 그렇게 저물었다. 

여러 국내외 정세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잘 대처했던 여왕이지만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은 가족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아들인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 사이의 오랜 갈등과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 이에 대한 왕실의 무관심한 대처는 전 세계인의 공분을 사며 왕실 폐지라는 강력한 비판을 낳기도 했다.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난 지도 25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당시의 슬픔이 여전히 남았다. 이는 새로 즉위한 찰스 3세가 넘어야 할 파고이기도 하다. 

2021년 개봉한 영화 ‘스펜서’는 다이애나를 조명하는 전기영화다. 그러나 순탄하지 않았던 결혼생활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비극적 죽음 등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1992년 별거 직전, 다이애나가 오롯이 느껴야 했던 숨막히는 감정에 집중한다. 이 작품은 영화적 상상력을 보태 구성했다. 

왕실 가족이 모여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는 샌드링엄 별장에 다이애나를 제외한 모든 구성원이 모였다. 여왕보다도 늦게 도착한 다이애나는 제일 마지막으로 몸무게를 쟀다. 파티를 즐겼다는 증거로 연휴 끝엔 몸무게가 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재미로 내려온 전통이라지만 섭식장애를 앓는 다이애나에겐 강압으로 다가왔다. 지나치게 넓은 별장은 한기로 가득했다. 소름 끼치게 추웠지만 입을 수 있는 옷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날짜별·상황별로 확정된 상태였고, 변경할 수도 없었다. 식사 시간에는 준비된 음식을 먹어야 했다. 정해진 스케줄에 늦어서도 안 됐다. 오랜 세월 누적된 방식이라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고,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늘상 지각했고, 복식 규칙도 어기는가 하면, 음식을 먹지도 못했다. 예민하고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는 다이애나의 눈에 띄는 행동을 왕실은 우려했다. 언론이 주목하지 않도록 자신의 본분에 맞게 규율대로 살면 될 일을, 다이애나만 실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초상화 속에 박제된 인물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내연녀가 착용한 것과 똑같은 목걸이를 선물 받고서 행복하게 웃을 수 없었다. 배신감에 가슴 아팠고, 누구도 사과와 위로를 건네지 않는 환경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결혼생활을 10년째 이어가던 1991년 크리스마스, 샌드링엄 별장에서의 3일을 기점으로 다이애나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왕세자비라는 역할극에 떠밀려 살 것이 아니라,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스펜서’는 남편의 외도와 자신을 옥죄는 왕실의 전통 그리고 무수한 감시의 시선으로 고통받던 다이애나의 감정에 집중한 작품이자 세상에 제 목소리를 내려는 용기 있는 결심에 귀 기울이는 영화다. 억압의 고통에 굴하지 않고 스펜서라는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통해 비극을 극복하려는 한 사람의 의지를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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