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쨍쨍쨍.’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가니 쇠 두드리는 울림이 땅에 퍼진다. 방문한 곳은 도마교동에 있는 군포시 방짜유기전수관.

방짜유기 제작 기술은 신라시대에 들어온 한국 수공예 중 가장 오래된 예술이다. 청동과 주석을 78대 22로 섞어 만든 제품을 말하며, 흔히 두들겨서 만드는 유기를 방짜라 한다. 

경기도무형문화재인 김문익 유기장은 이곳에서 전통 방자짜기 기술로 주발·쟁반·화로·꽹과리·징 등을 만들었다. 지금은 이춘복 전수자가 1998년 전수조교 1번으로 뽑혀 명맥을 잇는다.

방짜유기는 6명이 한 조로 일하는데, 옛날부터 경남 함양에서 징과 꽹과리 같은 방짜유기 제품이 전국에서 인정받았다.

이 소재로 만든 그릇은 병원균 살균과 농약 같은 유해 화학물질에 반응하고, 보온·보냉 효과로 음식 맛을 유지한다고 알려졌다.

녹인 쇳물을 바둑판에 붓는 과정.
녹인 쇳물을 바둑판에 붓는 과정.

# 18세에 입문, 어깨 너머로 일 배워

이춘복 전수자는 방짜유기 계통에 유명한 이봉주 중요무형문화재 밑에서 일하는 김문익 유기장을 따라 18세에 처음 들어갔다.

"44년간 이 길을 걸어왔지만 날마다 어렵다. 노력해서 두들긴다 해도 사람의 힘으로 요령껏 미세한 부분을 잡아야 하는데, 마치 끝없는 수련의 길 같다."

이골이 날 정도로 방짜유기 제작을 해 왔음에도 날마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기 힘들다는 이 전수자는 장인의 길은 ‘자신과 끝없는 싸움’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만드는 종류는 수도 없이 많지만 주된 업무는 꽹과리를 만드는 작업이다. "돈 욕심은 없어도 일 욕심은 많습니다." 수많은 전수자들 중 자신이 전수조교로 인정받은 이유는 묵묵히 일하는 모습 덕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더구나 이 일은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손으로 두드려 맞추는 작업이라 여간 어렵지 않다.

어린 시절에는 농업이 주를 이루다 보니 꽹과리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정해진 출근시간은 오전 7시지만 일 욕심 많은 이 전수자는 새벽 1~2시께 나가 꽹과리를 만들었다. 하나라도 더 만들면 그만큼 매출이 늘어나니 어깨 너머로 일을 배우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완성품을 만드는 사람을 ‘대장’이라 부른다. 대장들은 오전 6시부터 일하고 낮 12시쯤 물을 떠다 받치면 얼굴과 손발을 씻고 퇴근한다. 이들은 징을 하루에 10~20개 정도 만드는데, 하나를 만들면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을 받을 정도로 높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초짜인 이 전수자는 대장 보조나 허드렛일을 하며 보름에 3만 원 정도 받았다. 새벽부터 나가 풍구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반복된 일을 하니 잠이 모자라 가끔 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서 쇳덩이가 날아온다. 불기운이 일정치 못하면 제품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자칫 화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엄하게 교육받았다.

녹인 쇳물을 바둑판에 붓는 과정.
녹인 쇳물을 바둑판에 붓는 과정.

# 근면과 손재주로 전수조교에 낙점

어느 날 대장이 한번 만들어 보라며 쓰다 남은 재료를 던져줬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주문에도 어린 마음은 인정받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을 모조리 끌어들여 꽹과리를 만들었다.

다음 날 다 만든 제품을 보여 줬다. 대장들은 제품을 두드리며 요리조리 살피더니 욕만 먹던 신출내기를 칭찬했다. 이 전수자는 이 일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세상을 다 얻은 기쁨이 밀려왔다고 지난달을 떠올렸다.

이후 새벽 1시부터 일어나 물건을 만들어 놓으면 대장들이 수고했다며 인정했다. 빨리 주문받은 물건을 보내야 할 일이 생겼을 때는 하루에 180개를 만들기도 했다.

비슷하게 시작한 다른 문하생들은 이런 부지런함과 일 욕심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 일은 부지런함과 더불어 손재주가 필요하다. 굳은살이 박이면 계속 뜯어내면서 관리해야 손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난다. 지금도 손 관리를 하며, 생활 속 다른 곳은 다쳐도 손은 다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런 노력 덕분에 김 유기장의 마음을 얻고, 같이 일하던 문하생들에게 인정받아 전수조교에 뽑혔다. 근면성실과 남다른 손재주는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쇳물을 부은 바둑판에 톱밥을 뿌려 바둑알을 만든다.
쇳물을 부은 바둑판에 톱밥을 뿌려 바둑알을 만든다.

# 금 꽹과리 처음 제작

이 전수자는 1980년 김 유기장을 따라 군포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 오자마자 그동안 생각도 못했던 재료로 한 단계 향상된 울림을 주는 꽹과리를 만들게 된다.

‘신들린 쇠잽이’로 유명한 사물놀이 1인자 김용배 선생에게 금과 은을 넣어서 꽹과리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재료가 추가된다고 소리가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절히 배합하며 연구를 시작했다.

구리와 주석 위주의 비율에 금과 은을 섞고 두께를 조절하며 연구를 거듭했다. 그렇게 1년여를 고생한 끝에 1982년 마침내 처음으로 금과 은이 들어간 꽹과리를 만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만든 꽹과리를 넘어서는 좋은 소리가 난다. 금이 섞이면 연하고 은은한 맑은 소리가, 은이 섞이면 더 강한 소리가 난다.

김 선생은 길을 지나다 들리는 풍물패 소리에도 꽹과리 상태가 어떤지를 알아차리는 소리의 천재다. 그런 명인이 듣기에도 흡족한 제품을 만들었다.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춤사위에 사용된 바라와 김덕수 사물놀이패 악기를 제작해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사물놀이패가 미국 공연을 떠날 때면 50~60개를 만들어 달라며 찾아왔다. 울림이 좋기에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

또 다른 전통악기인 징도 만드는데, 꽹과리에 견줘 크다 보니 잘 깨진다. 절에서 쓰는 징은 더 단단해 그만큼 더 조심해야 한다.

몇 년 전 인근 절에서 깨지지 않는 징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작했다. 무게가 10㎏이나 되는 큰 징이어서 값도 비싸다. 이런 크기를 만드는 곳이 이곳뿐이기에 전국의 절에 소문이 났다.

오래 사용해 이상하게 소리가 변한 제품도 이 전수자가 이곳저곳을 두드리면 새로 만든 징처럼 제소리를 낸다. 물건도 좋다 보니 이곳에서 만든 징을 경험한 스님들이 전국에서 찾아온다.

완성된 징의 소리를 확인하는 김문익(왼쪽) 유기장과 이춘복 전수자.
완성된 징의 소리를 확인하는 김문익(왼쪽) 유기장과 이춘복 전수자.

# 대를 이어 전통기술 명맥 잇다

방짜유기는 쉬거나 변형되지 않고 오래 쓸수록 은은한 빛깔이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대전의 한 음식점은 40년 전 이 전수자가 일하던 공방에서 납품한 제품을 아직도 쓴다.

몇 년 전 이곳에 들렀을 때 깜짝 놀랐다. 주발과 수저를 얼마나 잘 관리했던지 판매품의 빛깔을 뛰어넘어 보석같은 광채가 났다. 계속 쓰고 잘 관리한 방짜유기는 공예품을 넘어 예술품이 된다. 

징·꽹과리는 소리가 중요하다. 소리를 어떻게 다룰지 가르친다고 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미세한 소리도 잡아내야 하며,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놋쇠가 풀어지고 뭉치는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이런 전통 기술과 비법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불을 조절하며 힘든 제조 과정을 거치니 젊은 사람들이 이 길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다행히 아들과 사위가 공방 운영과 방짜유기 장인의 삶에 뜻을 같이했다. 아들은 3살 때부터 꽹과리에 망치질하는 일이 놀이였다. 지금은 전시관에서 사무 업무와 배달일을 한다.

사위에게 기술을 익혀 일하면 어떻겠느냐고 권한 끝에 지금은 공방에서 수련 중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쇠가 녹아 버려 정신을 차려야 하니 혼나면서 일을 배운다. 숙련된 기술과 감각을 살려 전통의 명맥을 잇고자 노력 중이다.

놋그릇, 사물놀이 타악기 등이 지금은 기계로 만들다 보니 형태만 뜨면 자동으로 나온다. 여기에 그럴듯한 브랜드를 붙이면 백화점에서 비싼 값으로 팔리는 현실이다.

군포 공방에서 만드는 제품은 장인들이 소리를 들으며 두드려 만든 진품이다. 조상들의 슬기가 깃든 방짜유기 제작 기술이 후대에 전수되고, 뛰어난 제품 기능이 널리 알려져 세계적인 ‘K-컬처’로 소개되게끔 중앙·지방정부의 더 많은 관심과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군포시 방짜유기전수관이 무형문화재의 전승과 보존의 장이 되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공간으로 자리잡길 바란다.  

군포=임영근 기자 iyk@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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