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아픈 이민사 박물관

김실 대한결핵협회인천지부장

2017-07-23     기호일보

▲ 김실 대한결핵협회인천지부장

매주 토요일이면 고등학교 졸업 동기생들과 함께 잊혀질 수 없는 지역을 찾아가 살아온 지난 일들을 뒤돌아본다. 인천지역에서 이제까지 우리들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접했던 친근한 둘레길이다. 월미도 전망대에서 인천의 발전상을 보기도 하지만, 가슴 아픈 이민사박물관에 들어서면 자연히 숙연해지면서 지금도 다르지 않은 당시의 못난 정치 지도자 때문에 살던 곳을 떠났던 그분들의 어려웠던 결정에 가슴이 멈춘다. 어쩜 월남 패망 후 세계 각지로 떠돌던 보트피플보다 더 슬픈 사연과 가슴에 맺힌 서러움으로 어쩔 수 없이 세계 각지로 떠난 700여만 명의 한국인 디아스포라(해외 이주자)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세계 해외 이주자 대부분은 정치적 난민도 있지만 경제 문제로 고국을 떠난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해외 이주자는 국민을 돌볼 수 없는 못난 국가 지도자 때문에 지금보다 열악한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무국적자로 중세 농노와 다름없는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한국인 특유의 근면, 성실로 해외에 뿌리를 내리고 또다시 조국에 관심을 갖고 자녀들과 함께 찾아오고 또 그 뿌리를 찾아보려고 한다고 한다.

 국가적 보호도 없고 지켜줄 사회적 보장제도도 없이 단지 고용 농장주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최저 생계 이주 농업 노동자로 전문 분야 숙련 기술자가 아니기에 정당한 이주자로 제대로 된 노동 근로 조건이나 정당한 근로 노동 단체도 가질 수도 없었다. 문화가 다르고 지리정보가 전혀 없으며 또한 언어 장벽이 높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속절없이 비인간적인 신체적 학대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버틸 수밖에 없던 그들이기에 더욱 눈물이 난다.

 이민사박물관은 1902년 처음으로 공식적인 이민자들의 출발지인 개화 당시 인천의 도시 상황을 소개하고, 이민이 이뤄지기까지 국내외 정세와 당시 하와이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민자를 싣고 하와이로 떠난 첫 선박인 갤릭호 모형 배에 탑승해 열악한 선내 환경에서 먼 이민 항로에 올랐던 그들의 항해를 좁은 공간이지만 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었고 당시 배를 타고 먼 하와이까지 가는 배 안에서 겪었던 배멀미, 처음 접하는 음식, 배 냄새 등 험하고 먼 뱃길 고생을 생생하게 전하는 함하나 할머니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을 울렸다.

 당시 이민자들은 배우지 못하고, 세계 속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배고픔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에서 눈감고 험한 미지의 세계로 자신과 그리고 일부는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배에 올라탔을 때 그들이 가진 절박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직접적이든 중간 매체를 통해서 세계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정보를 접하지만, 그들은 해가 뜨면서부터 해가 진후에도 주어진 노동량을 채우기 위해 더운 열대의 열악한 환경에서 방고라는 번호표를 목에 걸고 사탕수수 농장에서 나중에는 멕시코의 가시 많은 선인장 에네켄 농장에서 당시 노동 착취 농업제도인 재식 농업(plantation) 노예로 말이 계약이지 팔려간 것이다.

 하지만 비록 어쩔 수 없이 당시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말이 이민자이지 팔려서 하와이, 멕시코 혹은 중남미지역으로 떠난 이들이, 못난 조국이지만 그래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자금을 모으고, 자녀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준 이민사박물관을 보면서 강한 국가 그리고 국민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정부와 최근 한반도 주변의 세계 강국들의 정치 지리학적 변수에서 새롭게 생각난다. 다시는 준비 없이 외국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떠나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슬픈 이민사박물관은 하나로 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