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창호 옹진군지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우리나라에서 포경업(捕鯨業)[포경(捕鯨 : 고래잡이)]의 시작은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 선봉의 서포항 유적에서부터 부산 동삼동 패총, 통영 연대도 패총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적에서 6천여 년 전의 고래뼈들이 출토됐다. 그리고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여지듯 소형 어선을 타고 작살로 고래를 잡는 모습은 원시시대의 포경이 일상적인 수렵활동의 한 부분이었음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포경업은 단순히 어육을 얻기 위한 수렵행위가 아니라 산업화를 위한 자원으로 인식됐다. 고래에서 얻어지는 기름은 유럽 도시의 밤을 밝히는 등유(燈油)가 됐고, 고래의 수염은 강철이나 플라스틱이 생산되기 이전, 코르셋 등의 여러 생활용품 제조를 위한 긴요한 재료가 됐다. 따라서 17~19세기 네덜란드·영국·미국 등의 포경선들이 경쟁적으로 북극해와 태평양을 누비며 향유고래·참고래·귀신고래 등을 남획했고, 19세기 말에는 러시아와 일본까지 후발주자로 가세했다.

▲ 대청도
서구열강들의 고래남획으로 대서양과 북극해의 고래가 멸종 위기까지 몰린 상황인데 비해 한반도 연해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황금어장이었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 연안에서는 상업화된 대규모 포경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연안에 표박(漂迫)한 고래를 다시 바다로 밀어내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이는 어쩌다 고래를 잡을 경우 백성들에 돌아가는 이익은 하나도 없고 관의 가혹한 수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임원십육지』·『오주연문장전산고』등에 기록)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상업적 포경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에 의해서다. 조선의 개화와 산업화를 갈망하던 김옥균은 고종 19년(1882) 수신사 고문으로 일본에 가 있던 중 나가사키에서 포경업이 성행하는 것을 보게 돼 비로소 포경업에 눈을 뜬다. 이듬해 고종에게서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라는 직을 수여받고 울릉도 개척과 포경업에 나섰으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해서 매천 황현에게 “김옥균은 집 밖을 나오지도 않고 입으로만 고래를 생산했다”(『매천야록』)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 ★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의 포경선 1 (울산사이버체험관 http://cyber.ulsan.go.kr)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근대 산업화된 포경업은 제국주의 침탈과정과 함께했다. 1899년 러시아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해 포경특허계약을 따내고 장생포 등지를 어업기지 삼아 동해에서 대규모 포경사업을 실행했다. 1900년에는 일본도 포경특허를 얻고 러시아와 경쟁했고,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러시아의 포경업을 금지시키고 1945년 해방 때까지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을 독점한다.

일본은 1909년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울산(蔚山)·장전(長箭)·대흑산도(大黑山島)·거제도(巨濟島) 등에 사업장을 설치하고, 1918년에는 대청도(大靑島), 1926년 제주도(濟州島)로 확장했다. 그리고 1934년 이후는 일본포경주식회사(日本捕鯨株式會社)와 공동어업주식회사(共同漁業株式會

▲ ★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의 포경선 2 ( R.C.Andrews, Whale Hunting with Gun and Camera, 1916)
社)가 시기를 달리하며 독점하고, 1938년부터는 일본수산주식회사(日本水産株式會社)가 독점했다. 전시 중이던 1943년 이후에도 일본해양어업통제주식회사(日本海洋漁業統制株式會社)와 서태평양어업통제주식회사(西太平洋漁業統制株式會社)가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을 맡았다.

  1918년 일본 포경회사의 기지가 됐던 대청도는 1930년대 초까지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30년대 초 포경실태를 보면 매년 포경선(捕鯨船) 3~6척이 출항해 30~40여 마리의 고래를 포획했으며, 그 가격도 20만~3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水産經濟新聞』1933년 11월 25일).  1926년부터 1944년까지 대청도 연안에서 포획된 고래의 종류와 마리수는 다음의 표와 같다.       

  【대청도 근해의 고래 포획수】

   
 

자료 : 1926~1935년, 농림대신관방통계과,『농업통계표』
                     1940~1944년, 일본포경협회,『포경통계부』

위 표를 볼 때 대청도기지가 193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포경업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경업에서 가장 흔하고 잡기 수월한 참고래[영어명;Right Whale, 일본명;長須鯨]의 경우 1926~1933년

▲ ★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의 포경선 3, 1918년 ( John Tonnessen, Den Moderne Hvalfangsts Historie, Vol. 2, 1967 )

전국 총 포획수의 18~49%를 차지했고,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대왕고래[영어명;Blue whale, 일본명;白長須鯨]도 대부분 대청도에서 잡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대청도의 포경업은 1934년부터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는데,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1931년 5월 5일자 《동아일보》는 장연(長淵) 대청도의 포경수(捕鯨數)가 40마리로 전해의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고, 가격도 마리당 1만 원인 것이 7천~8천 원밖에 안 되는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이는 어획량의 감소뿐 아니라 세계공황의 여파로 고래 수요까지 떨어져 가격하락이 됐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 ★ 《동아일보》1931. 5. 5.

 
                      
 
또 1935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일본포경주식회사의 대흑산도기지에서 74마리의 어획고를 올려 포경업 사상 최고의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아울러 동년 11월 5일 일본포경주식회사가 군산 어청도까지 진출하고 군산 부근에 가공장을 설치했다. 이는 1934년 동양포경주식회사의 뒤를 이은 일본포경주식회사가 서해안 포경업의 주력기지를 대청도에서 대흑산도로 옮기었음을 나타낸다 .
조선 말 김옥균이 부국강병의 한 방안으로 대두된 포경업은 시도조차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한 독점적인 산업이 됐다. 그리고 동해와 서해, 남해 바다를 가리지 않고 싹쓸이 어업을 행해

▲ ★ 대청도 포경회사 사업장(『대청면지』(1995) )

마침내 서해에서는 고래를 보기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1911년부터 1944년까지의 일본에 의한 고래의 종류별 포획량을 보면, 참고래 5천114마리, 귀신고래 1천306마리, 혹등고래 128마리, 대왕고래 20마리, 향고래 5마리, 정어리고래 4마리, 긴수염고래 1마리, 합계 6천578마리였다. 일제 시대에 있어 귀신고래는 1933년에 마지막 1마리가 잡힌 뒤에는 한 마리도 포경 통계에 올라 있지 않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86) “영종진 설치와 호적대장(1)”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