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 뤼팽, 에르퀼 푸아로, 형사 콜롬보를 후배들로 거느린 명탐정 셜록 홈즈는 범죄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그 때마다 반드시 범인을 잡아낸다.

19세기 영국 추리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 홈즈의 반대편에 설정한 살인범 '외다리 사나이' 스몰(Small). 그에게는 공범이 있다. 공범은 독화살을 불어 사람을 죽이는 추악한 기형의 식인종이다. 한데 그의 출신지가 왜 하필 인도의 안다만인가?

홈즈 총서의 하나인 '주홍색 연구'. 홈즈의 친구 왓슨은 '마이완드 전투'에 참전했다가 '살인적인 가지(Ghazi) 부족'에게 포로가 될 뻔했지만 '헌신적이고 용감한 영국 간호병'에게 구출돼 목숨을 건진다. 그렇지만 페샤와르 병원에서 치료받던 왓슨은 이번에는 '우리가 소유한 인도의 저주, 곧 장티푸스'에 걸린다.

자, 이쯤이면 셜록 홈즈는 명탐정이란 검은 외투를 벗어버리고 비로소 그 괴물성을 폭로한다. 홈즈는 대영(大英)제국에 독소가 되는 인도 출신 범인들과 인도의 저주를 색출해 영구추방하는 '인도 사냥꾼'이었다.

미셸 푸코는 말한다. 서구는 광인과 광기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반대편에 합리성과 이성적 인간을 창출해 냈다고. 푸코가 그토록 비판한 장-폴 사르트르도 말한다.
"유럽인은 동양인을 '괴물'과 '종'(從)으로 만들면서 인간이 되었다"고.

이와 아주 흡사하게 영국과 영국인은 그들 스스로를 위대하고도 우수한 국가(제국), 민족, 국민으로 창출하는 과정에서 인도라는 희생양을 제단에 바쳤다.

인도가 '신비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영국의 합리성은 더욱 돋보이기 마련이다. 19세기에 '신비적'이라는 말은 야만적, 비합리적, 열등적과 사실상 동의어였다.

내친 김에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 이미지를 창출한 '공범'을 더 추적해 보자.

소설(1924)과 영화(1984) 모두 대성공을 거둔 「인도로 가는 길」(E.M. 포스터)과 '타잔'의 원형이 된 「정글 북」(1894. 키플링 작). 이들은 영국과 서구, 백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도를 반대편에 세웠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영화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 수술 도중 실수로 소녀를 죽인 미국인 의사 맥스는 인도로 가서 '구원과 깨달음'을 얻는다.

서구가 인도를 비롯한 동양의 이미지를 창조한 이념적 체계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털리즘'이라 정의한다. 그렇다면 인도 뉴델리대학교에서 인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온 이옥순이 말하는 '복제 오리엔털리즘'은 무엇인가?

영국을 비롯한 서구가 만들어낸 인도 혹은 동양 이미지가 어느 새 우리 안에 전이된 오리엔털리즘, 이것을 '박제 오리엔털리즘'이라 일컫고 있다.

그러한 실례는 많다. 예컨대 삶의 활력소를 얻겠다며 인도로 떠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아주 흔하다. TV 강연을 훌쩍 중단하고 인도로 떠난 도올 김용옥이 그렇고, 재충전 기회를 갖기 위해 인도를 다녀왔다는 연극배우 최정원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인도에서 대오(大悟)한 듯한 모습이 완연하다.

그렇다면 인도는 과연 깨달음과 신비의 땅인가?

이옥순은 말한다. 인도에서 7년을 살아도 인도가 그런 땅인 줄 죽어도 모르겠다.내가 모자라서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신통력이 대단한가?

그는 말한다. 요가와 명상, 카레, 깨달음, '신비의 인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그것은 서구가 만들어낸 허상이며 이미지일 뿐이라고.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도에 카레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가 창조하고 어느 새 우리가 내면화한 인도에 대한 이미지를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푸른역사)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32쪽. 9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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