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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항에서 호놀룰루항까지 이민자를 운송하였던 미국 선박 시베리아호.
하와이로 출발하기 위해 제물포에 모인 이민자들은 배에 오르기 전까지 무엇을 했을까? 이들은 근대도시 인천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권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렌미국공사가 고종황제에게 하와이 이민을 진언하고 7개월 후인 1902년 11월 15일 하와이 이민 모집과 송출사업의 전권을 미국인 데쉴러에게 부여한다는 임명장이 수여됐고, 다음날에는 수학 유람 및 농공상업으로 외국에 여행하는 백성에게 여권의 발급업무를 담당하는 유민원(綏民院)을 궁내부 산하에 신설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綏는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수’로 주로 읽히지만 깃발이 늘어진다는 뜻의 ‘유’자로도 읽히고 있으며, 윤치호의 영문일기에 ‘Yu Min Won’으로 표기된 것에 비추어 유민원이라 읽는 것이 보다 올바른 것이다.

 이민자들은 유민원에서 당시에는 집조(執照)라 불렸던 여권을 만들어야 했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관장 조우성)의 분관인 한국이민사박물관은 하와이 이민자인 고영휴(高永休)의 집조를 소장하고 있다. 전라도 제주군 출신인 49세 고영휴는 미국의 포와도(布哇島 하와이)에 농업을 목적으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런데 여권에는 인천 우각동에 거주하는 상인 이여삼(李汝三)이 보증인으로 되어 있다. 여권에 보증인이 필요했던 이유는 하와이로의 이민에 필요한 경비는 이민자가 부담했는데, 사탕수수농장장이 선지급하고 매월 급료에서 일정액을 상환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로의 이민을 위해 제물포에 온 이민자들은 여권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주경비에 대한 보증을 해 줄 보증인을 제물포항에서 상업을 하고 있는 상인들 중에서 찾아야 했다.

 #이민모집자합숙소

 제물포에 온 이민자들은 어디에서 머물렀을까? 당시 국내 최고의 무역항이었던 제물포항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과 욱옥여관 등 많은 숙박업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머물기에는 숙박료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민자들을 위한 합숙소가 세워졌다. 동서개발회사가 설립한 이민모집자합숙소는 제물포의 내동에 위치했다고 하였는데, 현재는 2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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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항에서 호놀룰루항까지 이민자를 운송하였던 코리아호의 승선자 명단.
한 곳은 최성연의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지목한 내동의 옛 인천예식장 터이고, 또 다른 한 곳은 이민모집 사무에 관여했던 인척들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안형주가 추정하고 있는 현재 내리교회 옆 아펜젤러 선교관 자리이다.

공정자와 오인환은 『구한말 한인 하와이 이민』에서 두 곳 중 어느 곳이 합숙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 곳 모두 하와이 이민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본다면 한 곳은 이민모집 사무를 보고 직원들의 숙소로 쓰였을 것이며, 또 다른 곳은 이민 출항 대기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와이로 떠나는 날의 행적

 이민에 필요한 서류와 짐을 꾸린 이민자들은 출항 당일 어떤 절차를 밟았을까? 하와이 이민 1진들의 행적을 쫓아가 보자.

 오전 8시 이민 1진들은 데쉴러의 이민사무소에 집결해 출항을 위한 서류와 휴대한 짐들을 최종 점검하고 항해 중에 유의할 사항과 입국심사 때 필요한 사항 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오전 9시 통역원 등의 이민사무소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이민자들은 부두에 있는 해관으로 이동했다.

 1883년 인천이 개항을 하면서 조정에서는 개항장에 감리서를 설치해 해관(통상)사무를 관장케 했다. 이어 1883년 6월 16일 인천에 해관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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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자 고영휴의 여권.

해관은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사무 등을 맡아 보는 행정기관으로 오늘날의 세관과 같은 곳이다. 인천해관은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호텔의 동편에 설치됐고, 고종황제의 재정고문인 뮐렌도르프(목인덕)를 총세무사로 임명하고 영국인 스트리플링을 초대세무사로 선발해 해관을 운영했다.

설치 당시 1동의 건물이었던 인천해관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도 등 5개도의 통상사무를 관장했다. 1897년 목포와 진남포가 개항하면서 인천해관 지서를 설치했다. 통상사무가 증가하면서 인천해관은 건물을 신축·이전했다.

 해관에 모인 이민자들은 여권 검사, 휴대품 검사 등 출국을 위한 필요한 검사를 마치고 해관 잔교 승선장으로 이동했다. 만조 시간에 맞춰 승선장에서 차례로 작은 배를 월미도 해상에 정박 중이던 일본우선주식회사 소속의 현해환(겐카이마루)에 승선하기 시작한다.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이민이 시작되는 승선장에는 이민업무를 주관하던 유민원의 민영환총재와 직원들, 내리교회의 존스목사를 비롯한 내리교회 관계자들, 가족과 친인척들이 이민자들을 전송했다.

 제물포에서 하와이까지 가는 선편이 없었기 때문에 하와이 이민 1진은 호놀룰루항까지 연결된 미국 상선을 타기 위해 일본의 나가사키항를 경유해야만 했다. 제물포항에서 나가사키항까지는 일본우선주식회사나 오사카상선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선박을 이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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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공정자, 구한말 한인 하와이 이민 에 소개된 장선백화백의 인천예식장 스케치.
인천항에 일본의 기선회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1888년 4월 우편기선 미쯔비시회사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가 처음이다. 이후 1885년 우편기선 미쯔비시회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되어 일본우선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886년 7월부터 출장소가 일본우선주식회사의 인천지점으로 승격되면서 향후 인천의 해운업을 독점했다.

하와이 이민 1진은 일본우선주식회사의 현해환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출항한 것이다. 현재까지 신문기사 등에서 확인되는 제물포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이민자를 운송한 일본 선박은 일본우선주식회사 소속의 현해환과 대련환(다이렌마루), 오사카상선주식회사의 신농천환(신노오가와마루), 수마환(수마마루), 목증천환(기소가와마루) 등과 소속을 알 수 없는 경기환(쿄우키마루)와 오하이오호(S.S. OHIO) 등 7척이다.

 정오에 이르러 현해환으로의 이민자 승선이 완료됐고,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출발했다. 하와이 이민 1진 121명은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해 돈을 벌어 귀국해서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타향에서의 삶에 대한 불안을 갖고 점차 멀어져가는 모국의 마지막 모습인 월미도를 바라보며 고국을 떠나갔다.

 #또 한번의 관문, 신체검사

 12월 22일 제물포항을 떠난 이민자 1진은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이틀이 지난 24일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신체검사라는 또 한번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검역소에서 예방접종과 함께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19명이 떨어지게 됐다. 이들을 제외한 이민자 102명은 상하이↔나가사키↔요코하마↔호놀룰루를 연결하는 미국 서·동양기선주식회사 소속의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요코하마항을 경유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이르는 10일간의 여정에 오르게 됐다. 요코하마항까지는 이민모집자였던 데쉴러도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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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해관 전경.

 나가사키항에서 호놀룰루항까지 이민자를 운송했던 기선은 현재까지 11척이 알려져 있다. 미국 선박으로는 갤릭호(6회), 콥틱호(S.S. Coptic, 8회), 코리아호(S.S. Korea, 7회), 차이나호(S.S. China, 7회), 도릭호(S.S. Doric, 7회), 시베리아호(S.S. Siberia, 8회), 만추리아호(S.S. Manchuria, 3회), 몽골리아호(S.S. Mongoria, 5회) 등 8척이 51회 운송했다. 일본 선박으로는 일본환(닛뽄마루, 1회), 홍콩환(홍콩마루, 1회), 미국환(아메리카마루, 3회) 등 3척이 5회 운항했다.

 1903년 1월 2일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탄 102명의 이민자 1진은 요코하마항을 경유하고, 태평양을 횡단해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선상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13명이 탈락하고 89명만이 검역과 이민국 심사를 거쳐 하와이로 입국했다. 이들은 협궤열차로 갈아타고 오아후 섬 아이알루아농장 모쿨레이라에서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총 64회에 걸쳐 7천415명의 이민자들이 유사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경로를 통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떠났다.

< 글=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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