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논설위원
이인수 논설위원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프랑스에서 세상에 나온 지 200년 남짓 됐지만 그 연원은 2천 년이 훌쩍 넘어 로마시대까지 간다. ‘도덕정신’과 ‘솔선수범’, ‘공공정신’으로 대표되는 이 단어는 어느덧 그 사회의 건강성과 공정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됐다.

백년전쟁 때였던 1347년, 프랑스 칼레시를 점령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여에 걸친 격렬한 저항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며 시를 대표하는 6명을 처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극도의 혼란 속에 시의 최상위 부자인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처형을 자처했다. 그러자 시장, 법률가, 의사, 의원, 교수 등 지도층 인사들이 차례로 나섰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이라는 작품으로 당시 이들이 보여 준 희생정신을 기렸다.(결국 6명 모두 죽지는 않았다)

초기 로마시대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전 재산을 국가에 바치고 전장으로 달려갔고, 영국 최고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스쿨 졸업생은 1차 대전에서 1천 명 넘게 전사했다. 학교 교정에는 1천157명의 전사자들 이름과 함께 2차 대전 사망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포틀랜드 분쟁 때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 앤드류 왕자는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또 6·25전쟁 때 미군 장성들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이 중 35명이 전사했다. 이들은 비교적 안전한 후방이 아니라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도 6·25전쟁에 자원했다 한 달여 만에 전사했다.

관창으로 대표되는 신라 화랑들, 임진왜란 때 의병에 적극 나선 북인(北人)과 을사늑약 및 한일병합 당시 목숨으로 항거한 관료·유자들, 대지주의 안온한 삶을 뒤로하고 집단 망명해 조국 독립에 막대한 재산과 목숨을 바친 이회영·이상룡 등 일가, 정조 때 평생 모은 거금을 풀어 아사 위기에 처한 제주도민을 구한 여성 거상(巨商) 김만덕 등은 한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꼽힌다.

두 달간 진행된 인천 희망2025 나눔캠페인이 1월 31일 종료됐다. 여러 악조건에도 당초 예상과 달리 46일 만에 목표치를 달성했고 최종 모금액도 117억7천600만 원으로 역대 가장 많았다. 행사를 주관한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기업들의 고액 기부가 늘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실적을 보면 한 가지 특징과 함께 아쉬운 점이 보인다. 매해 빠지지 않고 꾸준하게 참여하는 기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천국제공항공사와 선광, 전문건설협회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인천공항공사는 지난 4년 동안 모두 56억 원을 기부했다. 해마다 10억 원을 넘겼고, 전체 모금액의 10~20%를 차지한다. 인천공항공사 아니면 목표액 달성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형편이다.

인천은 국내 제2의 경제도시다. 통계청 발표 결과 2023년 지역내총생산(GRDP) 성장률, 즉 실질경제성장률은 4.8%로 전국 평균 1.4%보다 3.4%p 높다. 2년 연속 전국 1위다. GRDP도 117조 원으로 전년보다 4조 원 증가했다. 전국 6위, 8개 특광역시 중에는 서울에 이어 2위다. 또 지역총소득과 광공업 서비스업 생산 등 제반 경제지표도 준수하다. 국내 최고 수준의 경제자유구역에 국내외 첨단기업과 대형 병원, 대학, 은행 등 입주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현재 인천의 상장기업은 모두 94개로 부산(82개), 대전(62개)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희망 나눔캠페인에 이미지 업이나 사업 관련 등 특정한 목적이 아닌, 지역사회 환원이라는 순수한 차원에서 생색내기용 단발성이 아닌, 꾸준히 참여하는 기업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해 창단 이후 처음 2부 리그로 강등된 인천시민프로축구단의 1년간 기업 후원금이 전체 수입 258억 원 가운데 14억 원밖에 되지 않았고, 후원기업 가운데 상장기업은 단 1곳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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