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의 視線 총 21건의 기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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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자동차, 한국지엠
한국 자동차산업의 역사는 인천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요즘 우리가 흔히 보는 자동차가 생산된 지는 60여 년이지만 그 연원은 훨씬 깊다. 일제는 1937년 부평 산곡동에 군용 지프 생산을 위한 ‘국산자동차회사’를 설립한 데 이어 2년 뒤에는 인근에 디젤자동차 생산공장 건립을 위한 일본인 근로자 사택도 지었다. 2차대전 패망으로 출고까지는 이어지지 못한채 폐쇄됐다.1955년, ‘국내 최초’의 승용차 ‘시발(SHIVAL’)이 부평공장에서 첫 선을 보였다. 미군 지프의 부품을 재생해 엔진 등을 만들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얹은 조악한 형
칼럼기호일보11-25 13:52 -
인천언론사료관(仁川言論史料館)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도 알고 계십니다. 다시는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죽어서 원혼이 되어서라도 위증하고 고문하고 조작한 사람들에겐...” 1979년 9월 13일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에 들어선 오휘웅(34)은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1974년 12월 30일 밤 10시 40분, 인천시 중구 신흥시장의 한 쌀가게에서 30대 가장과 어린 두 자녀가 숨진채 발견됐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는 물론 이후 수사·재판과정, 형집행에 이르기까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쌀가게
칼럼기호일보10-28 14:11 -
성묘(省墓)
“아버지여 아시나이까 모르시나이까, 어머님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가문이 금방 다 무너지고, 죽느냐 사느냐 지금 이렇게 되었어요⋯(중략)⋯이 아들 낳고 부모님 기뻐하시고, 쉴 새 없이 만지시고 기르셨지요. 하늘 같은 그 은혜 꼭 갚으렸더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리도 못 돼 버려⋯.”1801년 신유박해로 귀양길에 오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충주 부근 하담(荷潭)의 선영에 들러 부모의 묘 앞에서 쏟아낸 피울음이다. 사방 도처에 정적들이 칼부리를 겨누고 있던 터, 그가 다시는 살아서 이곳에 올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
칼럼기호일보09-30 14:03 -
환과고독(鰥寡孤獨)
“환과고독,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가장 궁색한 백성들로 어디다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옛날 주나라 문왕은 정치를 행하고 어짊을 베풀 때 반드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문왕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을 먼저 돌보는 것이 왕도(王道)입니다.” 제(齊) 선왕이 왕도정치에 대해 묻자 맹자가 한 대답이다.환과고독(鰥寡孤獨)은 늙어서 아내 또는 남편을 잃은 남자와 여자,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등 오랜 기간 사회적 약자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이들에 대한 정치적·국가적 관심과 배려는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3천
칼럼기호일보09-16 15:20 -
신촌문화공원
인천은 우리나라 미군(美軍) 주둔 역사의 시발이자 상징이다. 해방되던 그해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첫발을 디딘 미군들이 향한 곳은 부평이었다. 그곳에 있던, 당시 한반도 최대 규모 군수공장인 일본 육군 조병창을 접수해 ‘주한미군보급수송본부’로 사용했다.1949년 6월 잠시 철수했다 6·25전쟁 때 돌아온 그들은 부평에 캠프마켓을 비롯해 하이예스, 그란트, 타일러, 아담스, 해리슨 등 기지를 조성하고 이를 ‘애스컴시티(ASCOM CITY)’라고 명명했다. 보급창과 신병보충대, 야전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헌병대
칼럼기호일보09-02 14:19 -
용인(用人)
“山不厭高(산불염고) 海不厭深(해불염심) 周公吐哺(주공토포) 天下歸心(천하귀심).” 정세가 극도로 어지러웠던 후한 말기 조조(曺操)가 지은 4언시 ‘단가행(短歌行)'의 마지막 구다. 천하통일을 위한 인재 등용의 갈망과 정치적 야망이 물씬 묻어나는 시다.나라의 경영과 회사 운영, 조직을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용인(用人)이다. 능력 있는 인재를 구해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다. 나라의 흥기, 회사의 발전, 조직의 융성이 결국은 사람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중국 삼국시대 ’난세의 영웅‘ 조조는 용인술의 최고 달인으로 꼽힌다. 현실주의적
칼럼기호일보08-19 14:28 -
제3연륙교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다리(橋)를 마주한다. 직접 건너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한다. 실개천에 놓인 징검다리, 강과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 오래된 다리, 새로운 다리, 돌다리, 나무다리, 쇠다리. 그 장대함과 아름다움, 역사성으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다리는 책과 영화, 노래, 그림 등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한다.「드리나강의 다리」는 보스니아 출신 작가 이보 안드리치에게 1961년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작품이다. 오스만투르크(이슬람) 점령 이후 다리 주변 마을과 발칸 지역의 400년 역
칼럼기호일보08-05 15:12 -
광복 80돌⋯‘페치카’ 최재형과 仁川
최재형(崔在亨, 1858~1920)은 러시아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의 대부(代父)였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9살 무렵 두만강 일대에 닥친 심각한 대기근과 흉년을 피해 국경을 넘은 가족을 따라 연해주에 정착했다. 하급선원과 노동자 생활을 거쳐 사업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며 러일전쟁의 특수 속에 막대한 부를 일궜고, 그 부를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어려운 이웃 동포들을 위해 아낌없이 던진 러시아 한인사회의 거목(巨木)이었다.그 지역 한인들의 선생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었다. 집집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칼럼기호일보07-22 15:05 -
부산은 항만의 블랙홀인가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3일 기자회견에서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했다. 양해를 구하고, 현명한 국민들이 이해해 줄 것이라는 말은 부드러웠으나 의지는 단호했다. 오후에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는 ‘속도’를 재차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부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수록 어렵다, 충청도는 수도권과 비교적 가깝다, 인천은 인구와 경제 모두가 성장 중인 도시다.” 그날 대통령이 한 부연 설명은 부산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살갑게 느껴질 정도였다.그러나 글쓴이는 기자회견을 보면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국
칼럼기호일보07-08 16:27 -
다언삭궁(多言數窮)
이준석 개혁신당 국회의원의 의원직 제명 국민동의청원이 진행 중이다. 6월 4일 공개된 이후 가파르게 늘고 있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이준석 제명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와 의견을 꾸준히 국회에 전달하고 끊임없이 행동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50만을 돌파했을 때 나온 "숫자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이준석), "국민 여론을 대표한다고 보지 않는다"(천하람)는 발언이 감정의 불에 기름을 부은 모양새다. 청원은 7월 5일 마감된다.대통령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지난 5월 27일 당시 이준석 후보는 3차 방
칼럼기호일보06-26 20:29 -
인천국제해양포럼과 西海工程
인천국제해양포럼이 7월 3~4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다. 여섯 번째인 올해 대주제는 ‘격동하는 세계경제, 다시 도약하는 해양산업’이다. 이 행사는 국내외 석학, 관계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해양 분야 대표 지식포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에는 3천500여 명이 온·오프라인으로 함께했다. 이틀간 해운물류, 해양환경과 기후, 해양에너지·관광, 스마트항만 등 6개 세션이 운영된다. ‘도시의 국제경쟁력과 도쿄 대진화 그리고 인천’을 내용으로 하는 특별세션도 준비돼 있다.참석자들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해운 혁
칼럼기호일보06-10 20:20 -
130년 애관(愛館)과 공공매입
무려 100년 하고도 30년. 세기가 두 번 바뀌도록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극장(영화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다. 애관(愛館) 이야기다. 130년 전이면 영국 빅토리아, 프랑스는 벨 에포크, 우리와 달리 ‘융성과 번영’의 시기였다."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와 성공한 재산가다. 일본말 하는 사람이 귀하던 시절에 이에 능통한 외지인으로써 일본인과 결탁한 실업가다. 그는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다. 당시에는 남사당패 또는 굿중패가 흥
칼럼기호일보05-27 20:10 -
정책공약과 수도권매립지
매번 선거 때가 되면 정책공약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는 주로 지방자치단체, 지방선거 때는 시민사회단체가 앞다퉈 발표한다. 국가정책에 반영돼 예산이 지원되기를 바라는 ‘희망’과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지켜보겠다는 ‘압력’의 한 방편이다. 정책공약을 들여다보면 현재 나라 곳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다.인천시도 6월 3일 대통령선거와 관련해 주요 정당과 후보들에게 전달할 정책공약을 내놨다. 당면 현안들이 총망라돼 있다. 이 가운데 최근 치러진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칼럼기호일보05-13 20:11 -
귀환(歸還)
"나라의 장래를 위해 지방분권형 개헌의 필요성을 계속 주장해 나갈 것입니다." 국민의힘 대통령 선거 경선 1차 결과 발표에서 탈락한 다음 날인 4월 23일 유정복 인천시장이 시청 기자실을 찾았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면 복잡한 정치적 역학, 이익관계 때문에 개헌에 소극적인 사례를 많이 봤는데 이걸 깨야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이 이뤄집니다"라며 개헌의 당위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그에게는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통로가 있다.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그의 임기는 올해 말까지다. 협의회는 지방자치단체의
칼럼기호일보04-30 20:08 -
인천 지역유산제도
"어느 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조약을 맺어 바닷가 한편이 열리면서 모든 게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했다…(중략)…제물포가 인천의 중심이 됐다. 이방인의 짐 보따리와 함께 듣도 보도 못한 문화와 물화가 밀려들어왔다. 개방은 혼돈이었고 개벽이었다." 1883년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인천이 강제 개항됐을 때 사람들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 ‘세상의 뒤집힘’ 그 자체였다.서울과 가까운 인천은 이후 졸지에 조선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계획도시가 됐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자고 나면 바뀌는 세상이었다. 길거리에는 일
칼럼기호일보04-15 19:55 -
인천시의회에 없던 세 가지
요즘 인천 지역정가가 시끌시끌하다. 충격과 파장이 적지 않다. 아직 경찰의 수사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다. 향후 진행 상황에 따라 추가 구속자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자칠판 납품비리’ 관련 사건 얘기다. 인천시의원 2명에 대한 영장이 지난달 27일 발부됐다.현역 의원이 한꺼번에 둘이나 구속되기는 인천시의회 역사상 처음이다. 지난해 12월 23일에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교육위원회 사무실이 경찰 압수수색을 받았다. 역시 그 전에는 없던 일이다. 음주운전 의원(이번에 구속됐다) 징계를 위한 윤리특별위원회가 1991년 개원
칼럼기호일보04-01 19:59 -
민흥무사특(民興無邪慝)
조선 18대 임금 현종이 어느 날 신하들에게 일갈했다. "임금에게 박하고 누구에게 후하단 말인가." 1674년, 조선왕조를 통틀어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하고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던 2차 예송(禮訟)논쟁의 와중이었다. 당파 간 정쟁은 점차 격해지고, 당론이 국론을 앞서 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현종이 지적한 ‘누구’는 서인 노론의 거목이자 그 세력이 임금을 능가할 정도였던 우암 송시열(1607~89)이다. 왕과 신하, 신하들 간 정쟁은 더 심해졌고, 숙종대에 이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백 명씩 귀양을 가거나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내
칼럼기호일보03-18 20:19 -
유정복과 대권(大權), 그리고 대임(大任)
아이플러스 1억 드림, 천원주택, 제물포르네상스가 아니다. 대체매립지, 전자칠판, 주민참여예산, e음카드도 아니다. 요즘 인천 지역사회의 최대 관심주(株)는 ‘시장 유정복’이다. 최근 그의 입과 행보에 인천은 물론 타 지역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유 시장은 탄핵의 소용돌이가 한창이던 지난해 12월부터 ‘지방분권형 개헌’을 목 놓아 외치고 있다. 주장의 핵심은 대통령과 국회의 권한 축소, 지방분권, 중대선거구제 및 양원제 도입이다. 작금 대한민국 모든 정치적 문제 파생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87년 체제’의 극복이다. 그는 "권력은 중앙
칼럼기호일보03-04 20:05 -
뇌물(賂物)
조선 세종 때 터진 뇌물 사건이 온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건국된 지 불과 30여 년, 대상이 최고위 엘리트 관리였다는 점에서 그 충격파는 매우 컸다. 조말생(1370~1447). 태종 때 과거에 합격하고 도승지,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두루 지낸 그는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으로, 특히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그가 엄청난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율문에 뇌물을 받은 것이 80관(貫)이면 교형인데, 말생의 죄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것은 제외하고 현재 알 수 있는 것만 계산하더라도 780관이나 되니, 이를 용서하고
칼럼기호일보02-18 19:00 -
노블레스 오블리주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프랑스에서 세상에 나온 지 200년 남짓 됐지만 그 연원은 2천 년이 훌쩍 넘어 로마시대까지 간다. ‘도덕정신’과 ‘솔선수범’, ‘공공정신’으로 대표되는 이 단어는 어느덧 그 사회의 건강성과 공정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됐다.백년전쟁 때였던 1347년, 프랑스 칼레시를 점령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여에 걸친 격렬한 저항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며 시를 대표하는 6명을 처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극도의 혼란 속에
칼럼기호일보02-05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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