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때 터진 뇌물 사건이 온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건국된 지 불과 30여 년, 대상이 최고위 엘리트 관리였다는 점에서 그 충격파는 매우 컸다. 조말생(1370~1447). 태종 때 과거에 합격하고 도승지,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두루 지낸 그는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으로, 특히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그가 엄청난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율문에 뇌물을 받은 것이 80관(貫)이면 교형인데, 말생의 죄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것은 제외하고 현재 알 수 있는 것만 계산하더라도 780관이나 되니, 이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무엇으로 징계하겠습니까?" 세종 8년(1426년) 5월 27일 사헌부가 올린 상소다. 빗발치는 사형 요구에도 세종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유배형에 처했고, 그나마 2년여 뒤 풀어줬다.
조말생 사건은 드넓은 바닷가 자갈밭 속 하나의 작은 돌멩이 같은 사례다. 뇌물은 ‘힘의 균열’과 ‘권력’이 생긴 이래 인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고금,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뇌물은 존재했다. 특히 온정주의와 혈연, 지연적 특성이 강한 동양사회에서 심했다. 뇌물은 인사 청탁, 이권 개입, 편의 제공 등 인간의 사회생활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오간다. 정약용은 저서 「목민심서」에서 중앙, 지방 구분 없이 온 관료 구조에 사슬처럼 얽혀 있는 뇌물 관행을 통탄했다.
뇌물을 고리로 한 부정부패의 폐해와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심한 경우 국가 존립 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위정자들은 이의 근절을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거나 감시와 감찰을 벌였다. 조선은 뇌물을 받은 죄인의 경우 장안(贓案)에 이름을 올려 모든 관직과 명예, 부를 빼앗고 본인은 물론 자손들까지 벼슬길을 막았다. 분경(奔競, 인사 청탁)금지법, 관청 출입 금지법도 있었다. 때론 엄격하게 지켜지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현대에 들어서도 국민권익위원회, 김영란법 등 법과 제도와 기구를 운영하는가 하면 거액의 포상금을 내걸고 국민들의 신고나 제보를 독려하고 있다. 강도 높은 교육과 청렴도 평가도 매년 시행한다. 그러나 뇌물의 존재감은 여전히 꿋꿋하다.
지난 1월 31일과 2월 3일 전자칠판 납품비리 관련 뇌물수수 혐의로 형사입건된 인천시의원 2명이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앞서 경찰은 지난해 12월 이들 의원 자택과 시의회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납품업자 2명을 뇌물공여 혐의로 입건했다. 또 최근 추가로 몇몇 관련자들을 입건했고 다른 시의원 2명에 대한 내사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9월 고발을 접수한 경찰은 내사를 통해 2022년 9대 시의회 개원 이후 35건의 전자칠판 보급사업이 요구됐고 계양·부평·남동지역을 중심으로 30건을 계양구에 있는 E사가 설치했으며, 비슷한 시기 미추홀구·연수구·서구에 요청된 37건 중 30건을 부평구의 P사가 진행한 사실을 확인하고 11월부터 정식 수사를 벌여 오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6월 열린 인천시의회 제295회 정례회 예결특위에서 한 시의원이 "골고루 배치돼야 할 전자칠판이 특정 지자체에 쏠리고 있다"고 하자 교육청 관계자가 "각 학교가 위원(시의회 교육위원)들을 통한다든지 해서 배치와 보급이 되고 있다"고 답변한 데서 시작됐다.
현재 연관된 시의원들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된 한 의원은 지난해 12월 시의회 제299회 정례회 상임위원회에서 "(전자칠판) 정책 집행은 의원들이 하는 것이 아닌데, 의원들이 집행을 하는 양 말 한마디 실수로 전반기 교육위원들이 망신을 당했다. 피해는 학생들에게 간다. 앞으로는 답변에 신중하기를 바란다"고 질책성 발언을 했다. 시의회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별 문제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도 들린다. 뇌물은 은밀하다. 무고인지 사실인지 명백히 가려야 할 책임, 이래저래 경찰의 어깨가 무거워지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