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논설위원
이인수 논설위원

"어느 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조약을 맺어 바닷가 한편이 열리면서 모든 게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했다…(중략)…제물포가 인천의 중심이 됐다. 이방인의 짐 보따리와 함께 듣도 보도 못한 문화와 물화가 밀려들어왔다. 개방은 혼돈이었고 개벽이었다." 1883년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인천이 강제 개항됐을 때 사람들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 ‘세상의 뒤집힘’ 그 자체였다.

서울과 가까운 인천은 이후 졸지에 조선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계획도시가 됐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자고 나면 바뀌는 세상이었다. 길거리에는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해 영국·독일·러시아·미국 등 양인(洋人)들이 넘쳐났다. 이들이 사는 집, 일하는 사무실, 상점, 술집, 호텔, 공원, 공연장 등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았다. 그때까지 조선에는 없던 것들이었다. 저마다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노림수를 위한 삶의 파노라마가 얽히고설키면서 복잡다기하게 펼쳐졌다.

수십 년간 그렇게 켜켜이 쌓이고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휘돌아 오가던 길과 건물 등 모든 시공간이 지금 우리에겐 소중한 근대 역사문화유산이자 자화상이다. 하지만 이어진 일제 36년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 전쟁.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먹고 입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었던 엄혹한 세월 속에 유산의 발굴과 보존이라는 개념이 자리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가항력적 무관심과 전쟁, 개발의 와중에 대부분이 훼손되고, 파괴되고, 사라져 갔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은 풍전등화에 처했던 나라의 운명을 바꿔 놓았지만 그 대가로 인천 개항시기 근대사의 한 토막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안타까운 상황은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인천은 한때 대한민국 제일가는 서예의 도시였다. 검여 유희강(1911~1976)과 동정 박세림(1924~1975), 우초 장인식(1928~1993) 등이 이끌었다. 그러나 검여와 동정의 유품은 지금 인천에 없다. 검여의 작품 등 1천여 점은 성균관대 박물관, 동정의 작품은 대전대학교가 각각 소장하고 있다. 인천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작곡가 겸 가요연구가 김점도 씨가 갖고 있던 가요책자, 유성기판, 레코드판 등 대중음악 관련 2만여 점의 귀중한 자료도 용인의 한 회사 가요연구소가 보관 중이다. 고향에 남기고자 했던 유가족과 본인들의 바람을 인천이 철저히 외면한 결과다.

앞서 1999년 김재로(1682~1759)영정이 매물로 나왔다. 인천시 남동구 운연동에 있는 선산과 관련한 일 때문이었다. 그는 숙종·영조 연간 정치가요 대학자이자 노론의 영수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을 무려 4차례나 지냈고, 아들 치인도 영의정에 올랐다. 인천시와 벌였던 가격 협상은 결국 결렬됐고, 영정은 종적을 감췄다. 그해 12월 삼성문화재단이 연 미술전시회에 출품되면서 사람들의 궁금증은 풀렸다. 이러한 일이 터질 때마다 지역사회의 거센 질타와 비판이 쏟아졌다. 인천시는 반성과 대책 마련을 운운했다. 그러나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근대 역사문화유산의 수난은 끝나지 않은 채 되풀이됐다.

인천시가 올해부터 지역유산제도를 시행한다. 인천의 고유한 역사에 남아 있는 사건이나 인물, 정체성을 갖춘 일상의 이야기 등을 지역유산으로 선정해 미래 세대에 전승되도록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산업, 도시, 생활, 문화예술 5개 분야로 나눠 진행한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체계적인 발굴·보존 계획도 중요하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 외에 개인이나 가문 등이 보관한 소중한 유산들이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상태는 어떤지 등의 상황 파악이 급선무다.

역사문화유산은 도시를 바꾸는 위대한 힘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세계 곳곳에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또 도시가 유지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표한다. 역사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은 조상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정신을 찾는 과정이자 우리 스스로가 주인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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