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논설위원
이인수 논설위원

무려 100년 하고도 30년. 세기가 두 번 바뀌도록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극장(영화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다. 애관(愛館) 이야기다. 130년 전이면 영국 빅토리아, 프랑스는 벨 에포크, 우리와 달리 ‘융성과 번영’의 시기였다.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와 성공한 재산가다. 일본말 하는 사람이 귀하던 시절에 이에 능통한 외지인으로써 일본인과 결탁한 실업가다. 그는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다. 당시에는 남사당패 또는 굿중패가 흥행계의 주역이었다." 고일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 있는 내용이다. 이후 내리교회 존스 목사, 「개항과 양관역정」을 쓴 최성연, 문학평론가 김양수, 조우성, 이희환, 김남석 등도 기록을 남겼다. 1895년 협률사로 출발한 애관이 조선인의 손으로 세운 극장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실내 극장임에는 이견이 없다.

극심한 혼란기였던 구한말에서 암울한 일제강점기까지 수십 년간 애관은 우리나라 근대 공연 및 영화사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또 인천시민들의 정치, 문화, 사회, 일상생활의 중심이었고 애관을 빼놓고 인천을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랜드마크이자 상징이기도 했다. 그 화려했던 면모를 살펴보자.

남사당패나 기생조합 등의 전통극, 「육혈포강도」 등의 신파극, 근대극에 이어 1923년 무렵부터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표관’이 당시 유일했던 상설관이었던 점에 비춰 애관의 이러한 변신은 인천 영화사에 중대 변곡점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장르도 넉넉히 품었다. 토월회, 극예술연구회, 중국 극단들 공연이 끊이지 않았다. 국내 예술단체들의 조선 서북·서남지역 순회, 즉 서선(西鮮) 공연의 주요 경유지이자 기점 또는 종착점이었다. 일본인 일색이었던 그때 조선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공연장이었고 경제력, 교통, 인프라에서 경성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했던 인천의 여건과 시민들의 성숙한 관객문화 수준 때문이었다. 시민들이 애관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수치가 있다. 1936년 한 해 유료 입장객이 무려 12만 명이었다. 1937년에는 14만5천 명으로 늘었다. 당시 극장취체규칙상 월 15일만 상영이 가능했던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애관은 낙후한 시설을 개선해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자 대대적인 수리를 했고 1927년 10월 10일 낙성식을 열었다. 당시 김윤복 대표는 "공공적 모임에는 애관을 공개한다", "극계를 위해 애관을 활용한다"고 천명했다. 애관에서는 그야말로 ‘수많은’ 행사가 열렸다. 종류는 다양했고 계층과 색깔도 없었다. 예방접종, 도량형기 점검, 방공 및 노동 강연회, 발대식, 창립기념식, 시민대회, 주민자치행사, 어린이날 기념행사, 명창대회, 자선음악회, 무도(武道)대회 등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또 야구팀 ‘인천애관구락부’도 운영했다. 말뿐인 야구팀이 아니라 실업야구쟁패전에 참가해 1935년 우승하는 등 실력도 뛰어났다. 조선인만으로 이뤄진 유일한 팀으로 인기를 모았다. 이처럼 애관은 해방 때까지 지금의 극장과 영화관, 종합문화예술회관, 시민회관의 기능 모두를 합친 열린 공간이었다.

애관은 최근 10년 가까이 존폐 기로에 놓이면서 보존과 활용을 둘러싸고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간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하고 지난 4월로 돌아간다. 인천시는 애관의 공공매입 계획을 철회하고 대관 등 별도 운영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매입가격의 차이, 다른 근대문화유산과의 형평성, 사후 활용 방안 및 관리에 대한 부담이다. 글쓴이는 이 가운데 세 번째가 가장 큰 고민 부분이 아니었을까 본다.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근대건축물이 많았으나 전쟁, 개발, 화재, 자연 붕괴 등의 이유로 대부분 사라졌다. 역사의 한 부분이 한순간에 뭉텅이로 잘려 나간 것이다. 더 이상 인위적인 멸실은 곤란하다.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 계승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다. 더구나 애관은 건물은 옛 건물이 아닐지언정 그 이름과 숨결은 130년째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애관이 단순한 영화관(극장)이 아님은 역사가 증명한다. ‘영화’만이 아닌 ‘문화’와 ‘공공’의 시선으로 활용 방안에 대한 다각적이고 진지한 검토가 다시 한번 이뤄지길 바란다. 아울러 어떻게 사용되더라도 애관의 전통이 앞으로도 계속되기 위해서는 공공매입이 우선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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