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논설위원
이인수 논설위원

인천은 우리나라 미군(美軍) 주둔 역사의 시발이자 상징이다. 해방되던 그해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첫발을 디딘 미군들이 향한 곳은 부평이었다. 그곳에 있던, 당시 한반도 최대 규모 군수공장인 일본 육군 조병창을 접수해 ‘주한미군보급수송본부’로 사용했다.

1949년 6월 잠시 철수했다 6·25전쟁 때 돌아온 그들은 부평에 캠프마켓을 비롯해 하이예스, 그란트, 타일러, 아담스, 해리슨 등 기지를 조성하고 이를 ‘애스컴시티(ASCOM CITY)’라고 명명했다. 보급창과 신병보충대, 야전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헌병대 등 수십 개 단위 부대에 교도소까지 갖춘 이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였다. 철저히 ‘미군의, 미군에 의한, 미군을 위한’ 공간으로, 한국이 이곳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스컴은 한국에 들어오는 병력과 물자를 전국 미군기지에 배분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미군은 한때 인천을 뒤덮다시피했다. 부평은 물론 인천항, 월미도, 중구와 미추홀구(당시 남구) 주요 도심, 강화 고려산, 문학산 등지에 그들의 시설이 들어섰거나 부대가 주둔했다.

80년째 그 역사를 이어 오는 미군기지는 우리사회에 숱한 흔적을 남겼다. 명암이 교차한다. 해방과 전쟁 이후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미군과 미군기지의 존재는 분명 해당 지역의 활력소였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기대 생활을 꾸려 나갔다. 부평의 경우만 해도 한국인 종사자들이 많을 때 3천 명을 웃돌기도 했다. 또 1950~1960년대 우리 음악의 발전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유망 가수와 연주자들에게 이곳은 이름을 알릴 최고의 무대였고, 오늘날 ‘음악도시 부평’의 맥이 움튼 지점이다.

음울했던 그늘, 부작용도 많았다. 소위 양공주(洋公主)들이 몰려 있던 기지촌, 혼혈아 양산, 폭행·성폭력·살인·총기 등의 사고, 한국인에 대한 비하와 멸시 등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오영수와 오정희, 유주현, 이원규, 조해일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그 실태가 생생히 담겼다.

사회 일각에 미군기지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끈끈하게, 오랫동안 존재한 가운데 1990년대를 전후해 미군기지 부지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인천에서도 ‘인간띠 잇기’ 행사에 이어 1996년 ‘우리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인천시민회의’가 발족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23년 12월 캠프마켓 D구역을 마지막으로 부평 미군기지 부지가 온전히 우리에게 돌아왔다.

인천시는 그동안 시민토론회와 전문가 협의를 거쳐 캠프마켓 반환공여 B·D구역 28만㎡와 주변 지역인 부영공원 부지 16만㎡ 등 44만㎡를 신촌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일을 추진했다. 이 일대는 옛날 일본 육군조병창이 있던 곳이며 1986년 공원부지로 지정됐으나 미군 주둔으로 실현되지 못한 채 ‘금단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이 사업이 최근 행정안전부 타당성 조사 대상에 선정됐다. 본격적인 진행 절차에 들어간 것이다. 시는 앞으로 7개월간 이뤄질 조사 결과를 토대로 내년 하반기께 중앙투자심사를 의뢰할 계획이다. 사업 추진의 핵심은 부영공원 부지로 소유주인 국방부, 산림청과 현재 구체적인 사용협의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다. 1천800억 원에 달하는 땅 매입비를 국비로 지원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없는데, 다행히 시가 지역정치권에 관련법 개정이 이뤄지도록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신촌문화공원은 조성비만 3천억 원 이상, 부지매입비를 포함하면 전체 1조 원 넘는 돈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하지만 역사적·지역적 상징성과 의미는 그 비용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 후대 대대손손 자랑스레 물려줄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도심 랜드마크가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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