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내가 활용하는 조선왕조실록이 깜깜한 한자(漢子)로 돼 있는 줄 아는 분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물론 역사학을 배운 나는 이러저러한 자료를 읽을 수 있고 찾는 데도 익숙하다. 그래야 전문가연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조금만 알면 누구든 자료에 접근해 실제로 어떠했는지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다. 그 중 최고의 자료는 역시 조선왕조실록이다. 인터넷에서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난을 떠났다. 한양이 함락되고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모두 타 버렸다. 그런데 타 버린 것이 그것만이 아니었다. 역대 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 썼던 사초와 초
우리는 지금 광해군 시대를 읽고 있다.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학계를 비롯한 논자들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 문치주의라는 시스템의 측면과 사람들의 연대와 협력을 이끌어 내는 네트워크의 측면이다. 이것을 외치와 내치의 상관성, 즉 국제 정세의 영향이라는 변수 및 민생과 재정이라는 잣대를 겹쳐서 읽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이번에 처
즉위한 지 2년 만에 열린 경연, 그 후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다시 광해군 4년 김직재의 옥사를 계기로 그나마 드문드문 열리던 경연마저 중단됐다. 그 후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 이 사건과 관련돼 크고 작은 국문(鞫問)이 이어졌다. 광해군은 직접 국문에 참여하길 좋아했다. 그래서 사관(史官)은 “매양 병 때문에 경연에 나가지 못한다고 했지
광해군 2년 3월에 열린 《서경》 〈무일(無逸)〉편 강의를 시작으로 광해군 즉위 이후 2년 동안 폐지됐던 경연이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번 경연에서 논의했던 운운’하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후로 여러 번 경연이 열렸고, 거기서 논의된 정책의 후속 조치가 이어졌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이해 4월 말이 돼 다시 상참(常參)과 경
광해군 재위 후 처음 갖게 된 경연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광해군 2년 3월에 열린 《서경》 〈무일(無逸)〉편 강의였다. 이 강의는 그래도 경연다운 경연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무일’의 뜻에 대해 묻고 대답한 다음, 여러 가지 현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국정 현안을 논의하다이 당시 논의된 국정 현안을 간단히 살펴보는 데는 두 가지
경연(經筵)과 여알(女謁), 이것은 멀게는 동아시아 정치사의 경험에서, 가깝게는 조선 정치사의 맥락에서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이자 실천이었다. 경연은 공적(公的) 토론을 요구했다. 여알은 베개송사가 보여 주듯 은밀한 거래이기 쉬웠다. 조선 정치의 주역이었던 사대부들은 은밀한 거래가 가져올 위험보다 더디더라도 공적 토론을 통해 형성된 공론을 택했다. 물론 경연
제도의 역할은 지속시키는 것이다. 가장 나쁜 것도 지속시킬 수 있고, 가장 좋은 것을 지속시킬 수도 있다. 지속이 좋은지 나쁜지는 그 제도가 처한 역사적 타이밍에 의해 결정된다. 경연은 군주 혼자 판단을 내릴 때 초래될지 모르는 자의성의 위험을 피하고, 현안이나 정책을 근원적인 비전 속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 주는 제도적 장치였다. 그래서 하루 세 번, 몇
광해군이 즉위한 지 1년이 되도록 경연을 열지 않자 경연 주무관청인 홍문관을 비롯해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에서 독촉하기에 이르렀다. 영의정 이원익도 서둘러 경연에 나오라고 청했다. 경연은 함께 공부하면서 국가 정책이나 현안을 논의하던 자리였으므로 경연을 하지 않으면 상하(上下)의 의사소통이 단절될 위험이 높았다. 이를 막혀있다는 뜻의 ‘비(否)
모든 제도는 보수성(保守性)을 띤다. 제도는 현실의 확정이기 때문이다.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면 질곡이 되지만, 삶의 안정감은 리듬에서 생기며 리듬은 일정한 항상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특히 모든 변화가 삶을 개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같은 이유에서 변화에는 비전이 중요하다. 변화의 마스터 플랜, 요즘엔 로드맵이
흔히 역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소설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렇다. 역사는 이야기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소설의 이야기가 갖가지 색깔의 감동을 주듯이 역사의 이야기 또한 그 빛깔이 다양하다. 다만 논픽션은 픽션보다 보통 밋밋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아다시피 우리 인생이 그렇듯, 역사도 드라마틱하
대동법은 율곡 이이라는 걸출한 학자이자 정치가가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데서 출발했다. 당연히 서애 유성룡 등 이에 동조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율곡에게서 대동법에 대한 원칙과 실무를 배웠던 오리 이원익에 의해 비로소 처음 대동법은 정책화되었고 선혜청이라는 관청이 설립되기에 이르렀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 상황이 조정에 있을
어떤 시대든 구조화된 병폐를 바로잡는 일은 쉽지가 않다. 거기에는 기득권이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도이든 관행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기득권은 당시에 권력이든 부(富)를 가진 자들이 향유하게 마련이기에 개혁의 길은 험난하다. 지금 우리는 광해군대 대동법을 통해 그 평범한 진실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대동법 연구에서 지나친 인물그 동안 학계
우리는 대동법이 임진왜란으로 인한 민생 안정은 물론, 개국 이래 300년이 지나면서 구조적으로 혁신이 필요한 재정·부세 제도의 개혁을 위해 필요한 대안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광해군 때 조정에서 논의·실행되었지만 실제로 대동법을 비롯한 실권자였던 핵심 대북(大北) 세력은 대동법에 반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지난 호에 우리는 KBS ‘한국사 전’의 코멘트를 통해 광해군 초반 대동법 시행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그때, 광해군의 대동법 추진에 대해 양반관료들이 반대했다는 신병주의 코멘트를 검토하면서 대동법이라는 정책을 단순히 계급적 이해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논리의 오류와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논리의 비약, 사실의 왜곡또한 신병주의
#조심스런 시범사업광해군 원년, 이원익이 주장했던 경기(京畿) 대동법은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려는 데만 우선 뜻을 두었다. 첫째, 지역적으로 경기 지방에 한정했다. 이는 요즘 말로 하면 시범적으로 경기 지방에 운영하면서 정책의 득실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동법의 실시에는 해보지 않은 시책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이는 당연한
지난번에 말했듯이, 공물을 거두는 조(調)는 특산물로 내는 세금 제도였다. 지금처럼 상품유통이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는 산지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대장금’같은 사극을 보면 ‘진상(進上)’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이는 대개 ‘진상 공물’을 말한다. 물론 궁중에만 공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란 말이 있다. 조선시대 정책 당국자들이 자주 했던 말로, 백성들은 먹고 사는 일을 하늘처럼 생각한다는 말이다. 먹고 산다는 것. 사람이 먹고 사는 것만으로 사람 노릇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일만큼 사람의 행동을 규정하는 일도 없다. 먹고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먹고 산
지난번에 우리는 유영경의 유배와 사사(賜死) 논의와 함께 유영경의 전횡을 비판했던 정인홍의 등장을 살펴보았다. 선조 승하 열이틀 전인 1월 18일, 정인홍은 유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간 쌓인 유영경에 대한 세간의 불만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인홍은 조정이 유영경의 세력에 있던 상황에서 귀양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충청도 유생 이정원(李挺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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