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점점 한적한 것을 찾게 되는 까닭은 전깃불도, 차도 없는 섬 구석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많이 그리워해서다. 물론 온종일 적막 속에 지낸 건 아니어서 철마다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와 먼 파도 소리를 섞어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조용함 그 자체였다.이 나이가 되니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적막함과 고요함에 대한 희구로 연결됐음을 알겠다. 그리고 그 시절이 태어나기 전 무명(無明)이었던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한 가장 맑은 시절이었다는 것도 알겠다.글 쓰는 선비나 은둔처사
곧 모내기철이다. 쌀 생산량이 늘어나는 게 문제가 될 줄이야. 급기야 양곡관리법 개정으로 쌀값이 떨어지거나 생산량이 늘어날 경우 정부가 전부 사 주란다. 창고에 재고가 쌓여 넘쳐 나는데 어떻게 매입하느냐며 항변하자 그럼 밥 한 공기를 다 먹자는 운동을 벌이자고 하니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아우성이다.그렇다면 쌀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건 어떨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정책이지만 이게 통했던 시절이 있었다.1976년 시청에서 근무하다 당시 ‘북구 부개동사무소’에 발령을 받았다. 지금은 도시개발사업으로 온 동네에 아파트가 들
‘도화역’을 통해 출근한 지도 벌써 넉 달째다. 실로 도화역 앞에 선 것은 14년 만이다. 인천 ‘논현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인천역’에서 내려 다시 경인선으로 환승해 네 정거장만 지나면 도화역이다. 2009년 인천대학교에 근무할 때도 늘상 도화역에서 내려 출근했다. 달라진 것은 예전엔 4번출구로 나섰다면 지금은 1번출구를 통해 도화초등학교 방향 ‘테크노파크’ 건물에 있는 ‘인천시사회서비스원’으로 출근한다는 점이다. 그 전과는 정반대 방향이다.며칠 전에는 예전 일이 새록새록 떠올라 4번출구를 나와 과거 근무했던 인천대학교 쪽을 향해
중광스님과 우리나라 대표화가 중 한 명인 장욱진은 나이 차이가 18살이다. 나이 차이로 말하면 아들이나 제자뻘 정도이나 중광과 장욱진은 말하자면 선화(禪畵)의 동반자 관계였다.장욱진 화백을 기리는 글을 보면 지인들은 그를 원효(元曉)에 비유한다. 무애(無碍) 사상을 실천했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불교와의 인연도 깊었다.환갑이 지난 1979년도에 44살이던 중광을 처음 만났다. 고수는 서로 알아보는 것인가 만나는 첫날부터 둘은 통했다.잘 알려진 대로 어느 날 장욱진은 갑자기 중광을 앉혀놓고 초상화를 그려줬다. 까탈스럽기 그
일찍이 중광의 깊이를 알아본 랑커스터 교수님이나 구상 시인님, 장욱진 화백님처럼 그를 제대로 알아본 명사들이 한결같이 인정한 점은 파격이다. 중광은 들여다볼수록 참으로 무애(無碍)한 자유인이었으며, 천진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예술인이었다.중광은 그동안 우리가 공부했던 지식을 가벼이 뛰어넘었다. 모두 당연하다시피 잃어버린 원시적인 심성을 현대적 방법으로 소환했다. 예술가의 원죄인 모순적 양면을 숨기지 않고 천성적인 간결함으로 그려 냈다. 그 바탕에는 구도자인 견성(見性)의 체험이 선연히 녹아 있다.중광의 그림에서 나약함이나 감미로
지방공무원들의 필독서인 다산(茶山)의 「목민심서」는 청렴과 애민사상이 절절히 녹아 있는 지방행정의 교과서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8대 연속 홍문관을 지낸 명문가가 자신에 이르러 폐족이 됐음을 담담히 알린다. 그러면서도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며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큰길을 제시한다.무릇 시(詩)는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슬퍼하고 세상을 개탄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참된 것을 찬미하고 거짓된 것을 풍자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목욕은 언제 했는지 모를 지저분한 행색, 누더기 조끼와 낡아빠진 군복 바지, 중공시절의 당 간부나 썼을 법한 빵모자, 땟국 흐르는 가방을 메고 휘적휘적 거리를 쏘다닌다. 필자는 중광스님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세상의 온갖 비난과 욕설을 술과 안주 삼아 취해가면서 도저무비(到底無非)의 예술세계를 펼친 중광스님은 스스로를 걸레라고 했다. 1977년 영국 아시아왕실협회가 방한해 열린 행사에서 중광은 예의 기괴한 복장으로 나타나 「나는 걸레」라는 시를 읊었다. 그 후부터 걸레스님으로 불렸다. "걸레는 다 떨어지면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초헌(초軒)이라는 게 있었다. 문관으로서 종2품(현재 차관보 정도) 이상인 관료만 탈 수 있었던 외바퀴 수레이다. 바퀴는 작으면서도 높이는 한 길이나 돼 탄 모양을 바라보면 사닥다리로 지탱하는 지붕에 오른 듯 위태로웠다.움직일 때는 다섯 사람이 붙어 잡아야 했고, 반드시 별도로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위험하고 불편했고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정사를 살필 때 위에 올라탄 것을 자랑하지 말고 항상 주위의 수고하는 자를 생각하라는 뜻도 포함돼 있지 않았을까.이번 지방선거처럼 선거로 취임한 자
걸레스님 중광은 춤을 많이 췄다. 참으로 고독해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춤을 췄다. 그 무아지경에서 무엇을 잊고 싶었을까. 무엇을 감추고 싶었을까. 혼자나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진지하다가도 여럿과 섞이면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더워지면 옷을 벗고 질탕한 춤사위에 놀아났다가 승방에 돌아오면 예외없이 극도로 차분해져 좌선을 하고 새벽까지 붓을 들어 달마를 그렸다.그의 춤은 속가의 남은 연(緣)을 떨어내는 것이었고,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항이었다. 무애의 자유를 찾는 수단이었다. 그래야 달마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금은 알려졌던 중앙 문학지에 작품을 내고 등단이라는 명예를 얻은 지도 30년이 지나간다.욕심처럼 시, 수필, 아포리즘, 단편소설, 동화, 동시 등을 마구잡이로 써 보고 시답잖은 책도 몇 권 냈지만 여전히 쓰기 어려운 것이 동화나 동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적이고 물욕만 넘치는데, 맑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심정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 같다. 과거 전파견문록이라는 어린이 프로를 자주 봤다. 어린이들의 재치에 감탄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린이가 설명을 하고 어른들이 그 설명에 맞는
길이는 두 자 정도에 폭은 한 자가 채 안 되는 작은 그림이다. 낮은 맞배지붕의 집은 텅 비어 있는 듯 허름하다. 집 좌측에 잣나무 두 그루가, 오른쪽에 잣나무 한 그루가 늙은 소나무 옆에 서 있는 쓸쓸하고 황량한 겨울 풍경이다. 그림의 좌측에 300여 자의 정갈한 글을 썼다.추사(김정희)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돼 기약없는 유배생활을 할 때인 59세(1844년)에 그린 국보 180호인 세한도이다.자신의 처지를 한탄함도, 왕을 원망함도, 홀로 된 고독의 문구도 없다. 덩그런 집 한 채와 네 그루 나무로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추사는
코로나로 지치고 또 지치는 이 겨울엔 평안북도 정주쯤에 있을 여우난골에 한 번 가자. 거기 가서 이미 110살이 넘은데다 엊그제 제삿날이 지난 백석(白夔行)을 오라 하자. 가다가 가즈랑집에 들러 아들 없는 할머니에게 어느메 산골에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우난골에 가서 온 식구들과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놀아 보자. 백석은 제 여우난족과 어울리고 우리는 기억도 가물한 할머니, 할아버지, 그 아래 졸망졸망한 식솔들과 한바탕 얘기꽃을 피워 보자. 개에게 쫓기다 고무신을 잃어버려 징징 울던 어려서 죽은 친구도 불러 놀아
지방공무원의 꽃이라면 5급 사무관이다.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역할이 바뀌기도 하지만 나이나 경력 등 가장 원숙한 직급이다. 전에는 사무관이 되기 위해 모진(?) 시험을 치러야 했다. 1차 시험은 객관식이었지만 2차 시험은 주관식이라 글씨도 잘 써야 했고 한자도 잘 섞어야 했다. 거의 40대 후반인 6급들이 사무관 시험에 몰두했다. 지금은 모두 심사승진으로 5급을 달아 일단 9급에 합격하기만 하면 다음 시험은 없는 셈이다.조선시대 선배 공무원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과거시험은 소과·문과·무과·잡과가 있었는데 과거의 꽃은 문과였다. 3년
충신(忠臣)이란 의롭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말한다.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할 때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고,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신하이다. 그들의 직간은 때로 덕이 있는 주군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간신들의 참언에 칼이 돼 날아오기도 했으니 그들의 운명은 순전히 주군의 어리석고 아닌가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다.중국의 도가서(道家書)인 「포박자(抱朴子)」에는 "도끼로 맞더라도 바른 길로 간하며, 솥에 넣어서 죽이려 하더라도 옳은 말을 다하면 이것을 충신이라 이른다"고 했으며, 당 태종시대의 정관의치(貞
제주도로 귀향 간 추사는 귀한 책을 구해다 주는 제자에게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 줬다.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흔히 말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말한다. 지조와 절개를 의미해 시나 그림의 소재로 많이 쓰이고 선비나 군자의 영원한 벗이었다. 추위 속에도 꿋꿋한 아취를 잃지 않는 대나무와 매화를 세한이아(歲寒二雅)라 하고 매화와 국화를 세한이우(歲寒二友)라 한다. 세한우가 겨울철에 빛나는 식물로 시련을 참고 견디는 상징이라면 문인묵객의 영원한 화두가 된 사군자(四君子)는 계절의 순서를 따라 붙였다.
아들이 직장관계로 서울에서 잠시 전세를 살다 다시 집으로 오게 됐다. 인터넷으로 전출신고를 했는데, 가구주 확인이 필요하다며 ‘주민센터’에 가서 전입신고를 해 달라는 것이다. 예전 같지 않고 요즈음은 왜 이리 ‘주민센터’가 붐비는지, 전입신고 하러 왔다고 하니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고 본인 확인은 물론 신고서에 꼼꼼히 기재하고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아들의 심부름을 하고 나니 기분이 매우 흡족했다. 나도 아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집에서 인터넷으로 하고 싶었지만 굳이 가서 하기로 한 것은 예전 아버지가 내 심부름을 할 때의 그 심정
한국전쟁 이후 인천 시내 여러 곳에 외국군 부대가 주둔했다. 부평 신촌에 ‘애스컴’이라고 불린 큰 규모의 미군부대가 있었고, 내가 살던 숭의동로터리 인근에도 영국군 부대가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본국에서 보급됐다. 그들이 식사 후에 생긴 음식 쓰레기를, 부대에 취업한 한국 근로자들이 유출해 동네에 팔았던 음식이 ‘꿀꿀이죽’이다. 돼지의 사료용으로도 이용돼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여겨진다. 당시 서민들의 먹을거리라고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구호물자인 480양식(쌀)과 우유가루, 시중의 강냉이죽, 밀가루 정도였다. 먹고 사는
코로나로 인해 1년 하고도 반이 지나도록 본의 아니게 위리안치의 형국인 국민들이 한둘이 아니다. 확진으로 인한 격리생활은 말로만 들었던 옛날의 위리안치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시대에 죄인에게 내리는 형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의 5단계가 있었다. 태형은 작은 회초리 정도였고 장형은 173㎝에 폭 16㎝나 되는 버드나무로 된 치도곤을 비롯해 길이와 넓이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했다. 곤장 100대를 맞으면 거의 살아남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도형은 3년 이하 기간 일정 장소에서 노역에 동원되는 벌이었고 장형이 병과됐다.유형은 차
아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거실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리모컨을 옆에 두고 두 손으로는 말린 빨래들을 연신 개면서 말이다. 가끔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타서 그 옆에 갖다 놓으면 아내의 손길은 더욱 바빠진다. 이런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될까 말까 하다. 외손녀 돌보랴, 성치 않은 친정어머니 모시고 병원 다니랴 바쁜 아내는 일주일간 빨랫감을 쌓아 뒀다가 한꺼번에 세탁한다. 그리고 말린 다음 잘 접어 개어서 양말은 양말대로 팬티는 팬티대로 옷가지들을 분류해 놓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옆에서 지
최근 오정희의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를 재미있게 읽었다. 한국전쟁 직후 인천 북성동 중국인 거리(차이나타운)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 이곳으로 이사와 겪은 체험과 성장 과정을 그렸는데 소설 속에 나오는 장소가 하나도 낯설지 않고 정겹게 다가왔다. 특히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곳은 청일조계지 계단 옆으로 "그 앞의 목조건물 2층에는 양갈보 매기 언니가 세 들어 살고 주말이면 양공주를 찾아 나온 미군들로 소란스러웠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디인지 금방 짐작이 갔다. 1981년도에 ‘북성동사무소’에 근무해 당시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