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마치고 조명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이야기입니다. 국내에는 자기가 원하는 분야를 배울 수 없다며 비행기에 몸을 실을 만큼 자기 색깔이 분명한 친구입니다. 친구는 새침한 척하지만 잠시만 같이 있으면 소탈을 넘어 털털한 성격을 숨기지 못합니다. 조명 컨설팅은 특성상 현장 근무가 잦습니다.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며 설계한 디자인이 마지막으로 연출되기까지 조명 선정부터 실내장식 전반을 총괄합니다.건설 현장을 누비던 친구는 여자가 겪는 낯선 어려움을 종종 토로했습니다. 먼지 자욱하고 위험이 도사린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늦은 시간
뉘른베르크는 독일 바이에른주 제2의 도시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고즈넉한 중세도시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다. 옛 형태를 잘 유지한 성과 탑 그리고 중세 교회의 모습에서 여유롭고 고풍스러운 오래된 독일을 만난다. 완구 박람회로 유명한 도시이면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소설가 김훈은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 느낌이 없으면 한 줄도 쓰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훈의 말이 아니어도 김훈에게서는 연필 이미지가 연상된다. 작아진 몽당연필을 모아 뒀다가 독자들에게 나눠
삶은 관계의 상호작용이다. 서로 믿는 신(信)은 삶의 중심이자 뿌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삶을 선(善)하고 조화(和)롭게 끌어가는 네 방위(方位)다. 인의예지신은 우리 사회의 공기와 같기에 맑은 공기 속에서 열고 달고 맺고 닫도록 과정을 살펴야 한다.근래 우리 사회에는 공정(公正)을 다투는 논의가 많았다. 청년들은 기회의 문제였기에 특히 민감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공정과 관련한 논의는 번영의 열매나 고난의 짐을 어떻게 분배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눈앞의 이익에 멀어 근간이 흔들리고, 또한 원만하게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새로운
성남 쪽방촌 어느 반지하. 들어서자마자 깜깜한 어둠을 뚫고 냄새가 밀려온다. 곰팡이와 지린내. 말이 안 되는 냄새였다. 감당할 수 없는 곳에서 젊은 신부님은 평생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세웠다. 가난한 사람을 찾아 낮은 곳으로 향하자. 안나의집 김하종 신부의 삶을 바꾼 냄새 이야기다. 신부님은 그 냄새를 극복했을까? 인문공동체 책고집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전국 9개 권역 12개 시설에서 170여 노숙인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진행했다. 총 100여 회 강연에 강사만 38명이 손발을 보탰다. 피날레는 강의에 참여한 노숙인들과
눈앞에 보이는 건 사슴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슴이 없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사슴 이미지는 대부분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듯 한곳을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고, 눈망울이 호수 같아야 사슴이지요. 우리는 무심히 서 있는 사슴을 본 적이 있을까요. 동물원 울타리 너머로 먹이를 갈구하는 사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숲에서 우연히 만난 사슴 말입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눈이 마주칩니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무심한 듯하지만 사이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릅니다. 누군가 한쪽이 움직이기 전
개구쟁이 아이는 노인이 됐습니다. 아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지요. 아이 시절을 겪지 않는 노인 역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세부 묘사가 생략된 아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쉽게 떠올립니다. 순수 그 자체의 해맑음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무와 까치, 산과 달은 함께 길을 걷는 동무지요. 동무는 관찰해서 재현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이 좋은 풍경 같은 존재입니다.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은 게 없는 동무들 덕분에 제멋대로 자리를 잡은 비현실적 구도와 배치는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뒷짐 진 노인에게서는 아무런 사심(私心
회사와 집만 들락거리며 일과 씨름하던 시절, 우연히 들은 ‘향유(享有)’라는 단어에 울컥한 적이 있었다. 허울 좋은 껍데기로 산다는 생각에 그대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술 한잔이 유일한 낙이었고, 자유와 혜택이라는 ‘권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일이 나를 향유했고, 운명이 나를 누렸다. 안 되겠다 싶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다만, 읽고 쓰는 모양새는 여전히 씨름하는 형국이었고, 상대가 일에서 나로 바뀌었을 뿐이었다.싸우지 말라고 한다. 싸워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얘기다. 특히 자기 자신과 싸움이 그렇다. 싸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눈을 감고 있네요.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따로 없습니다. 생각에 잠긴 채 벽에 기댄 얼굴은 평온합니다. 그녀를 비추는 햇살은 따사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녀는 담쟁이를 두른 벽에 한쪽 등을 의지한 채 서 있어요. 그 모습에서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외로움이 보이는 순간 그녀에게만 집중됐던 시선은 전체를 더듬어 갑니다. 아! 그녀가 기댄 곳은 건물의 벽이 아니고 담이네요. 무심히 지나쳤다면 평생 벽에 기대어 해바라기하는 여인으로 기억했을 겁니다. 담 왼쪽으로 나무로 된 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부서지고 벌어진 문 뒤
검은 바탕에 흰색 선이 어지럽게 가득합니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에는 식구들을 넉넉히 먹이는 것이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양(羊)이 많으면(大) 먹을 걱정, 옷 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기에 두 글자가 만나서 아름다울 미(美)가 됐습니다. ‘Big Yam Dreaming’이란 제목에는 야생 감자가 많이 자라 원주민들이 식량 걱정 없이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땅속에서 감자줄기가 얽히고설킨다는 건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한 자연의 섭리입니다. 감자와 마찬가지로 얽히고설키며 사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호주 원주민 에밀리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불완전한 인간의 시선을 묘사한 권여선의 단편 ‘실내화 한 켤레’에 나온 대목이다. 원시를 가진 주인공이 멀리 있는 행운은 잘 알아보는데 정작 자신 주변의 불행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설정이 매력적이다.바둑에서 대국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한 수씩 재현하는 과정을 복기라고 한다. 조직에서도 과제가 끝
작품명 ‘레드’.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가 죽기 직전에 그린 유작입니다. 빨간 색면 덩어리 두 개가 위아래로 캔버스에 물들여져 있습니다.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서로 스미는 색면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단순히 빈 공간을 채워 가는 그림은 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자가 아닌 이상 무에서 유를 뚝딱 만들어 버리는 재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꽃은 피고 집니다. 그 안에는 한없이 피어나고 속절없이 지는 과정이 담겼습니다. 핀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을 그릴 수는 없을까요? 연작이라면 모를까 하나의 형태
잘 익은 소년의 등 위로 귓불이 붉습니다. 햇살은 빛나는 육체가 자기 자리인 양 소년의 어깨 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소년의 등. ‘등대’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등대는 희미하고 소년만 보이는 그림입니다. 영국 화가 헨리 스콧 튜크는 ‘감각적이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동성애를 다룬 김봉곤의 소설 표지에 같은 화가의 그림이 실려서 화제가 됐죠. 그 전에는 1970년대 게이 문화가 사회에 알려지면서 자주 소개됐습니다.결과적으로 튜크는 남성 누드의 부활을 주도했지만 처음부터
근대에 들어오면서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질서를 찾으려 했다. 파고들수록 세상은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로 이뤄졌다는 것만 더 분명해졌다. 근대의 시작을 열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내걸었다. 유럽인들의 눈과 귀가 집중됐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전제 권력으로 귀결됐다. 자신들이 찬미해 온 가치관의 죽음을 지켜보는 나날이었다.죽음은 본질적으로 삶을 낭만으로 이끈다. 낭만은 인간 정서를 환기하고 정화하는 매력을 지녔다. 낭만적 경향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 지속됐고, 다른 나라보다 관념적이고 종교적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중 완성된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주문을 받았어도 작품의 완성 여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내놓지 않았다. ‘모나리자’ 역시 밀라노와 로마 그리고 인생을 마감한 프랑스로 그림을 들고 다니며 조금씩 다듬었다. 미완의 작품 앞에서 팔짱을 낀 채로 하루 종일 사색하는 일이 더 많았다.우리가 형태를 잡을 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점과 선은 사실 수학적 개념이다. 자연은 수학을 모른다. 자연에는 정확한 점과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윤곽선으로 사물의 경계를
저마다 인문학 붐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인문학을 찾아간다. 소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사는 사회 약자들이 있다. 정말로 인문학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과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는 ‘노숙시민’을 대상으로 달마다 인문학 강의를 진행 중이다. 노숙시민은 5년째 이 강의를 이끈 책고집 최준영 대표가 쓰는 용어다. 노숙인도, 노숙자도 아닌 노숙시민이다. 나는 ‘그림과 나’를 주제로 노숙시민 앞에 섰다.노숙시민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들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앳된 얼굴의 청년 노숙시
자연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물들일 염(染)이다. 염(染)은 만남이며, 만남은 충격을 동반한다. 충격은 자국을 남긴다. 자국은 염(染)이 동작하는 원리가 자연에 드러난 형식이다. 자신의 틀을 깨고 변화에 호응하는 수고스러운 과정이 드러낸 실재(實在)다.비는 땅에 자국을 남기지만, 우리는 올라오는 흙내에서 메마른 땅에 온몸을 부딪쳐 땅을 적시는 비의 수고로움을 맡지 못한다. 새싹은 온 세상을 자국으로 물들이지만, 싱그러운 봄에서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비집고 올라온 새싹의 수고로움을 보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염(染)
최고의 화가를 꼽으라면 바로 자연이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가을 산을 울긋불긋 물들인다. 자연에는 타의(他意)가 없다. 자연은 붓을 들어 색을 칠하지 않는다. 자연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물들일 염(染)이다. 산을 이루는 나무들 각자가 자신의 색을 바꾼 이후에 산은 울긋불긋 물든다. 보리 하나하나가 파랗게 변한 이후에 보리밭은 파랗게 물드는 것이다. 자연이 하는 일은 보리밭이 파랗게 물결치도록 바람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물든다는 것은 그 안의 개별적 주체들이 스스로 호응하기에 가능한 일이다.물든다는 자신 안으로 물(水)을 들
나혜석 거리는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한동안 말하지 못한 사람들이죠. 정리되지 않은 감정에 정리되지 않을 감정이 더해지면 정리된 감정마저 취한 듯 휘청거립니다. 그쯤 되면 이 밤의 끝은 요원합니다. 거리는 아무 말 없이 우리 이야기를 들어줍니다.말하고 싶은 욕구가 바닥나고 이젠 주위가 눈에 들어올 때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을 만납니다. 나혜석은 여성의 신분이 낮았던 시대에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삶을 살았던 신여성입니다. 선구적인 삶,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드라마 같은 삶입니다.나혜석은 신
"인간아!"부끄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 거울에 보이는 자신을 향해 툭 터져 나오는 한숨이지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오래 삭힌 울음입니다. 한동안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그런다고 거울은 뚫리지 않습니다. 이내 물로 얼굴을 몇 번 식히고 머리와 매무새를 다듬고 나서 밖으로 나옵니다. 부끄러운 짓을 멈출까요?무경어수 경어인(無鏡於水 鏡於人).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비춰야 한다고 합니다. 물이나 거울이나 매한가지죠. 사람은 내가 옳고 남이 틀리다는 마음으로 진화했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왼편과 오른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얼굴을 포갠 두 사람은 한없이 편해 보입니다. 젊은 연인에게서 아무런 그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제 막 시작되는 사랑일까요? 고요한 연인의 얼굴에 싱그러운 기운이 피어납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비집고 올라와 봄 햇살에 얼굴을 맡긴 채 잠시 숨을 고르는 새싹 같습니다. 젊은 연인을 향해 두 손으로 프레임을 잡아 봅니다.나는 뭉클했습니다. 이내 그들을 응원해 주고 싶었습니다. 프레임 밖에는 숙명처럼 맛보게 될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아니 폭풍우는 참고 기다리는 법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