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열등함’과 ‘열등감’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열등함은 자신의 어떤 점이 부족하다는 객관적인 ‘사실’이고, 열등감은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뒤따르게 되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면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게 돼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빅 예스」(송진구)에 따르면 가장 빠른 물고기는 돛새치로 시속 110㎞이고, 지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은 치타로 시속 111㎞나 되며, 하늘에서 가장 빠르다는 군함조는 무려 시속 400㎞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과 땅, 심지어 하늘에서도 ‘대충’ 잘하는 동물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오리’입니다. 대충 헤엄칠 수 있고, 대충 달릴 수 있으며, 대충 날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리는 자신이야말로 하늘과 땅, 그리고 물속에서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여길 겁니다. 못하는 게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못하는 게 없다는 것은 곧 잘하는 것이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런 이치는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모든 면에서 다 잘한다고 착각하는 오리와도 같은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전혀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성장할 수가 없겠지요. 뭐든지 ‘대충’만 할 줄 아는 오리가 경쟁력을 잃고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오리가 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그러면 더 높이 날기 위해, 더 빨리 달리고 더 빨리 헤엄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처럼 ‘대충’만 할 줄 아는 오리가 아니라 독보적인 오리로 거듭날 것입니다.

 사람도 같습니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열등함을 느낄 때는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백 번째 원숭이를 움직인 생각」(아사미 호호코)에 경영컨설턴트인 신이치로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는 1948년 신장암 진단을 받고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치료해도 효과가 없자 퇴원하고는 집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암흑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방으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에 문득 아침 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옥상으로 기다시피 해서 올라갔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옥상에 올라가 떠오르는 해를 처음 봤을 때 그는 무척 기뻤을 겁니다. 그러나 거듭 올라갈수록 자신이 건강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동네 꼬마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들, 이웃집 강아지의 귀여운 재롱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을 보면서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어서 저렇게 아름다운 존재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책에 따르면 그는 떠오르는 해를 봤을 때 두 손을 모으고 "오늘도 살았구나!"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기도는 "오늘도 내가 살아있어서 떠오르는 저 찬란한 태양을 볼 수 있다니 참으로 감사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생기고, 그 의지로 인해 그는 결국 ‘기쁨’을 얻었습니다. 무척 아이러니합니다. 절망적인 ‘죽음’과 충만한 ‘기쁨’이 공존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책에 따르면 매일매일 이렇게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그의 병세는 신기하게도 조금씩 회복됐다고 합니다. 

 자신의 열등함을 열등감으로 채우면 ‘대충’만 할 줄 아는 불행한 오리처럼 살게 되지만, 열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감사하는 삶, 성장하는 삶 그리고 회복되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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