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유기로 만든 9첩 반상기.
안성 유기로 만든 9첩 반상기.

안성의 대표 문화유산하면 ‘안성맞춤 유기’를 떠올린다. 유기를 사용하면 좋은 점은 전통으로 겨울에 밥을 따뜻하게 해 주는 보온 기능이다. 그리고 유기는 독성분을 감지해 내며, 미나리 같은 채소에 붙은 거머리를 솎아 내기도 한다.

최근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O-157균을 없애 주며 장염비브리오균도 99.9% 없애 준다고 한다. 이처럼 멋스러우면서도 우리 건강에 이로운 ‘안성맞춤 유기’를 낱낱이 해부한다.

# ‘안성맞춤 유기’ 역사

‘유기’란 좁은 의미로는 놋쇠로 만든 그릇을 가리키는 말이며, 넓은 의미로는 동을 기본으로 비철금속의 합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기물을 말한다.

전통으로 놋쇠는 구리 78%에 주석 22%, 즉 동 1근(600g)에 주석 4냥 반(168.7g)을 배합하는데 이를 유철이라고도 한다.

안성맞춤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안성 유기 제작 현장을 재현한 미니어처
안성맞춤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안성 유기 제작 현장을 재현한 미니어처

배합 비율은 방짜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데, 주물유기를 만들 때는 그 비율이 약간씩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기를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삼국시대에 활발하게 사용했다는 기록은 남았다.

안성지역에서 유기와 관련해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작품은 죽산면에 있는 ‘장명사지 탑지석’이다. 장명사지는 관음당이라고 하는 옛날 절터를 말하는데 죽산면 주택가 한가운데 있다. 이곳에는 현재 파손된 불상이 남았다. 1972년 이곳에서 출토된 탑지석과 청동원형사리함 때문에 장명사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곳에서 나온 탑지석은 현존하는 고려시대 탑지석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는데, 여기에는 고려 초기인 997년에 이미 안성 죽산지역에 유기를 전문 제작하는 ‘지미지’라는 유기장이 있었고, 그 시작은 이미 천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내려온다.

조선시대 안성장터의 유기 장수 모습.
조선시대 안성장터의 유기 장수 모습.

조선시대에는 1614년 택당 이식 선생이 조부의 천장과 관련해 전라도에서 경기 양평 쪽으로 올라오면서 안성 유점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안성에서는 유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유기 제작이 성행했음을 짐작함 직하다.

조선 후기에는 중앙 관청에서도 안성 유기장의 뛰어남을 알고 국가 행사 시 안성에서 유기장을 징발했는데, 이런 사실은 ‘의궤(儀軌)’에 잘 나타난다.

의궤는 혼례식이나 장례식 같은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뒤에 논의, 준비 과정, 의식 절차, 진행, 그 밖에 행사 전반을 기록한 책이다.

1744년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혼례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에 안성에 뛰어난 유기장이 많이 있다는 기록과 함께 김태강, 김가노미 같은 장인 이름까지 뚜렷하게 나온다. 1857년 순조의 비인 순헌왕후 장례식을 정리한 ‘국장도감의궤’에도 안성 유기장 이름이 나온다.

이런 사실로 미뤄 18세기 중반 이전에 안성 유기장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불려갈 정도로 전국에서 이름을 떨쳤다고 볼 만하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김수영 유기장.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김수영 유기장.

# 견고·정교·미려

안성공원에는 많은 비석들을 모아 놓았는데, 그 중에는 1841년 안성군수를 지낸 정만교의 선정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갓점, 연죽점, 숟가락점, 야점, 목수점 같은 10여 종의 수공업자 명단이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유점(鍮店)이 나온다. 이로 미뤄 당시는 군수의 불망비를 세워 줄 정도로 수공업자들의 영향력이 컸고, 그 중 유기점도 강성했다고 봄 직하다.

안성유기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품질이 좋아서다. 1934년 동아일보 기사에 안성 유기는 옛날부터 견고하고 미려하며 정교한 특색이 있는 까닭에 전국에서 환영을 받는다고 했다. 즉, 황해도 같은 다른 지역 유기보다 가공을 한층 더해 모양이 미려하고 정교하며 견고한 점이 특징이라고 한다.

기산풍속도 속 안성 유기 제작 모습.
기산풍속도 속 안성 유기 제작 모습.

# ‘안성 유기’와 ‘안성맞춤’

안성이 유기로 유명하게 된 다른 이유는 판로를 충분히 확보할 만한 안성시장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다.

안성장은 대구·전주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큰 시장이었다. 그 시장을 바탕으로 서울과 가까운 지리 이점을 이용해 궁궐이나 양반가의 그릇을 주문생산하면서 유명해졌다.

유기를 만들어 판매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시장에 내다 팔려고 만드는 ‘장내기 유기’와 주문을 받아 만드는 ‘맞춤 유기’가 있다. 맞춤 유기는 재료와 모양까지 고급스럽게 만들어 안성에 유기를 맞추면 마음에 꼭 든다고 해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 양반 장인·여자 상인 

안성에서 유기가 발전한 중요한 점 하나는 상인을 천시하지 않고 장인들을 존중하는 안성 특유의 문화다.

안성은 예로부터 갓 수선, 꽃신, 백동연죽, 한지, 방각본 제작이 크게 성행하던 지역으로 수공업 발전에 따라 많은 장인들이 활동했다. 그 중에는 양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직접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는데, 안성 유기 제조 장인들 중에는 가난한 양반들도 있었다.

이처럼 양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현상이다.

조선시대 안성 유기점.
조선시대 안성 유기점.

유기는 안성에서 만들어 안성장에서만 팔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팔았는데 유기 상인 중에는 여자들이 많았다.

조선시대 안성 유기상은 직접 등짐을 지고 전국의 시장뿐만 아니라 가정마다 방문해 팔았다. 1925년 정관해 선생이 쓴 「관란재일기」에는 ‘유기 파는 여자가 집에까지 와서 판매했다’고 기록했다.

홍원의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사.
홍원의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사.

경기민요인 ‘건드렁타령’에는 "경기 안성 처녀는 유기 장사로 나간다지, 주발대접 방짜대야 놋요강을 사시래요"라고 해 처녀들이 전국으로 유기를 팔려고 다녔다는 사실과 그 중에는 방짜 유기도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이 밖에도 1928년 간행된 잡지 ‘별건곤’의 ‘팔도여자 살림살이 평판기’에서 안성 유기상에 대해 말하길 "안성 여자들은 대개 유기를 남자 보부상과 같이 짊어지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파는데, 그 행상인 중에는 종종 미인도 있어 이 세상에 향기로운 이야깃거리끼치는 일도 많다"고 기록했다.

이렇듯 안성 유기 판매상에 여자들이 많은 사실도 안성유기 명성에 일조를 했다고 판단된다. 

<홍원의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사>

사진=안성맞춤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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