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 산곡남중 교장
전재학 인천 산곡남중 교장

인류에게는 민족 또는 국가마다 독특한 인사 방식이 존재한다고 널리 알려졌다. 그 중 고대 로마에서는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라는 인사법이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당신’은 나와 관계된 모든 존재를 일컫는다. 자녀 교육에 집중해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보는 부모는 매우 기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 충만해 그가 무언가 성취했을 때 이를 지켜보는 연인의 마음 역시 그럴 것이다. 이는 교육적으로 무엇과 비유할 수 있을까? 제자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스승은 청출어람의 보람을 만끽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행복한 관계로 만들어 주는 이런 태도는 이타심(利他心)에서 출발한다.

 과거 최고 지성인의 상징인 대학 총장들의 좌담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본다. 세계적 명문 대학들의 학교 비전을 말하는데 저마다 ‘인류문명에 공헌하는 인재’,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도하는 인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여하는 인재’ 등 이타심을 최우선으로 거론하는 것과는 달리 ‘국가공무원 시험에서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는 대학’을 자랑으로 내세우며 국가에 필요한 최고의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한다는 한 국내 대학 총장의 발언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그 기저엔 교육의 역할인 인재 양성에서도 오직 시험을 통한 최다 합격자를 배출해 개인의 출세를 지향한다는 교육목표는 학교 비전으로서 저급하게만 느껴졌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우리 교육의 비전을 말하기에는 여전히 불편하다. 우리 교육은 온통 ‘시험만능주의’를 표상하며 이것만이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교육인 양 인재 육성에 몰입돼 있다. 이는 국가 비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인재들이 오직 자신과 가족, 소속 집단만을 위한 이익 추구와 기득권 사수, 나아가 입신양명에만 매달려 있다. 어디를 봐도 인간 사는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고 세상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이타심을 가진 인재 육성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 교육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 뿐이랴. 우리의 초·중등학교 교육은 거창한 구호만을 앞세운다. 예컨대 ‘21세기를 선도하는 창의적인 인재 육성’, ‘꿈과 끼를 펼치는 창의력이 풍부한 인재 양성’ 등을 내세우며 표면적으로는 참으로 교육적이고 훌륭하다. 하지만 교육 현장의 실체는 상급 학교 진학에만 매몰돼 있다. 특목고(과학고·외국어고·영재학교 등)와 전국 단위 자사고 진학을 최고의 목표로 내세우는 중학교와 ‘SKY 대학’ 또는 ‘인(In) 서울’ 대학의 진학 성과만을 우선하는 고등학교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교육 수요자인 학부모들의 편향되고 출세 지향의 전통적 교육관도 문제지만,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에서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에만 연연하는 학교의 교육과정 운영도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쯤 혼자서만 빠르게 앞서 달려가는 경쟁 교육이 아닌 연대와 협력을 중심으로 함께 멀리 가는 행복교육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이는 곧 개인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교육에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타적인 인재,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기르는 교육으로의 방향 선회를 의미한다. 이는 원래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전통적 사상이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출세지향적 가치와 국시(國是)가 돼 버린 경쟁교육에 의해 있는 둥 없는 둥 두루뭉술하고 오랫동안 빛바랜 무늬처럼 보인다. 

 이제 대한민국은 "오늘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보다는 "오늘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며 행복했나요?"라고 묻거나 더 나아가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라는 인사를 생활화하는 이타적 삶의 방식을 우선적으로 배우고 실천하는 교육을 구현해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당신이 행복하면 좋겠습니다’는 이타적 삶의 의지가 작동해 그것이 자신의 행복으로 선순환되는 교육으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워 나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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