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초빙교수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초빙교수

어느덧 만추(晩秋)의 계절이 다가와 산들은 붉은 색상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추(秋)라는 글자는 벼(禾)에 불(火)이 난 것 같은 모습을 형용한다. 파란 하늘, 울긋불긋한 단풍과 황혼녘의 햇살은 멋진 가을 풍광이다. 사계절의 순환으로 초록이 단풍에 밀려나지 않았더라면 창밖의 저 멋진 풍광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려고 구름처럼 들로, 산으로 몰려다닌다.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할수록 단풍은 더 붉게 물든다고 한다. 단풍도 신산(辛酸)의 아픔을 겪어야 더 값진 것으로 인정받을까? 열매를 맺은 나무는 여름 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뿌리에 낙엽으로 보은(報恩)을 한다. 엄동설한에 고라니, 노루들은 이곳에서 잠시 추위를 피해 갈 것이다. 낙엽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은신처가 되기도 할 것이고, 여름 내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렸던 뿌리의 발 덮개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다.

 인간의 삶도 나무의 성장, 소멸과 다르지 않다. 봄에 꽃이 피고, 뜨거운 여름의 장마와 태풍을 거쳐야 나무들이 그늘도 만들고 열매를 맺듯, 사람들도 젊은 날에 뭔가를 위한 땀을 흘려야 보람찬 노년의 삶을 맞이할 수 있다. 때로는 방황도 하지만, 어설픈 놀음꾼처럼 허망한 일에 젊음을 탕진한 채 백발을 맞이한 노년의 모습은 고운 단풍과 거리가 멀다. 얕은 생각과 혈기와 오만으로 들떠 지낸 젊음은 ‘혼란의 동맹군’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 날 겪는 시련과 고통은 자신을 다시 추켜세워 줄 수 있는 자양분이 될수록 좋다. 천둥과 번개, 서리를 인내하며 대추는 붉게 물든다. 대추가 저절로 저렇게 붉어질 리 없다던 어느 시인의 시구에는 깊은 통찰력이 들어있다. 화엄경은 먼지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설파했다.

 인간의 삶 속에서 노년은 붉은 단풍과 무관해 보일 때가 많다. 건강과 돈, 소통 능력을 적절히 지니지 못한 노인은 뒷방 늙은이로 떠밀려 나기 십상이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상품가치를 잃고 기회를 박탈당하면서 물화(物化)돼 가는 과정이다. 스스로의 준비와 가족, 사회복지제도의 도움이 없다면 장수(長壽)는 ‘독이 든 선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노인이 돼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고난과 역경을 견뎌 냈다는 증표다. 아무리 평범한 노인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생존경쟁이라는 전장(戰場)을 헤쳐 나온 지혜를 품고 있다. 늙음이 자신의 잘못으로 다가오는 죗값이나 치욕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 과정이라면, 노년의 삶은 잉여의 시간이 아니라 천둥과 번개, 비바람을 견뎌 낸 영웅들에게 주어지는 값진 전리품이다.

 요즘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 노인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노인들의 모습들이 달라지고 있다. 그들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보려 노력하고 사회 곳곳을 꾹꾹 눌러 밟는다. 곱게 물든 산에 휴대전화를 들이대며 모두 사진작가로 변신한다. 사진은 볼품없어도 마음만큼은 일급 작가다. 붉은 감이 매달린 감나무의 모습은 여름날의 초록빛 나무보다 멋지다. 그러나 독선과 아집으로 물든 고집 센 노인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라떼’를 외치며 생물학적 자기 자신과 과거의 사회적 관계망(지위, 명예)의 향수에 젖어 그곳에 머무는 사람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분별과 지혜도 늘어나야 하며, 눈앞의 자잘한 현실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생물학적 자연(自然)과 사회관계망의 인연(因緣)을 모두 벗어난 초연(超然, 緣)의 자유를 향하는 것이 멋진 노년의 모습이 아닐까? 임진왜란 때 고승 진묵대사(震默大師)는 눈앞의 자잘한 욕심(탐貪, 진瞋, 치癡)을 버리고 자연과 벗하는 스케일 큰 게송(偈頌)을 남겼다.

 "하늘을 이불로 삼고 땅을 자리로 삼으며 베게를 산으로 삼네.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하여 바다를 술동이로 여겨 크게 취해 그대로 일어나 한바탕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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