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인천의 권번은 초기 설립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지만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전후 상황은 추정해볼 수 있다. 즉, 1909년 조선의 관기제도가 폐지된 이후 ‘용동기생조합소’에서 출발한 ‘용동권번’은 ‘소성예기권번’ 등으로도 불리다가 1930년대 중반 ‘인화권번’ 그리고 ‘인천권번’ 등 명칭을 달리하면서 인천 경제의 성쇠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해 갔다.

인천 옛 향토사가의 글에 "인천 기생의 수준은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을종 ’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빠(Bar)’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18년 출판된 「조선미인보감」에는 경성을 비롯한 대구, 김천, 동래, 창원, 광주, 평양, 수원, 개성, 인천, 안성, 연기의 권번, 혹은 기생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던 예기들 611명에 대한 개인 프로필과 사진을 싣고 있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486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인천조합의 대표적 기생으로는 유명옥(창원), 김명옥(전주), 김홍매(대구), 조점홍(경성), 김연홍(경성) 등 5명이 소개됐는데 이들의 현주소는 모두 인천부 용리 228번지, 90번지, 156번지 등 3곳이다. 당시는 용동기생조합에 가입된 3곳이 인천을 대표했으며 대외적으로 인천을 대변하는 의미에서 ‘인천조합’이라 했던 것 같다.

특이한 것은 기생 5명의 원적지가 서울, 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인천 출신 기생이 없다. 이런 경우, 권번 기생을 모집 혹은 권유했을 인물의 연고와 연관됐거나 개인 사정, 혹은 개인 장기(長技)에 맞는 교육 습득 등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자기 지역보다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아무래도 출신 지역에서는 친척이나 지인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영업에 방해될 수도 있었기에 출신지역이 다양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례는 경성의 한성권번, 대정권번, 한남권번, 경화권번 외 각 지방 조합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용동권번은 초기 한국 대중예술계에 유명 스타를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천의 권번이나 예인(藝人)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몇몇 개인의 활동을 통해 살펴볼 수밖에 없는데, 가수 이화자와 장일타홍, 배우 복혜숙과 유신방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 중 일부는 용동권번에서 재능과 미모로 유명세를 타다가 캐스팅 됐으며 혹은 이미 알려진 배우였으나 경제적 여건으로 권번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화자는 1918년경 부평 출생으로 인천 권번 소속 기생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1935년경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작곡가 겸 가수였던 김용환에게 발탁돼 가수로 진출하면서 당시 인기 절정이던 평양 기성(箕城)권번 출신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능가하는 민요가수로 주목을 끌었다. 장일타홍은 출생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1934년 삼남지방 수재민 위문 음악회에 대한 신문기사에 인천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돌연한 부친의 병사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기적(妓籍)에 몸을 두게 된 애화의 주인공으로 소개됐다. 데뷔는 경성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영예의 1등을 차지하면서 이루어졌다.

복혜숙은 1920년 극단 신극좌에 입단해 연기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국 최초의 신극 여배우가 됐다. 인천과의 인연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인천권번에 3년간 체류하면서 기예 활동을 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또, 인천 기생 오향선으로 알려진 유신방은 인천에서 기생을 하다가 영화감독이었던 나운규의 눈에 들어 1927~8년 무렵 여배우로 데뷔했다.

권번 기생의 대중예술계로의 진출은 대중문화 확산의 촉매제가 됐다. 이들은 라디오의 음악방송에 주로 출연했고, 왕수복, 이화자처럼 음반을 취입해 대중적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초창기 영화도 유신방 사례처럼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가 중심이었다. 각종 전람회와 박람회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기예(技藝)도 각 권번의 기생들이 맡았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선의 특산품으로 예기(藝妓)를 출품하려 했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권번의 예기(藝妓)들은 일제강점기 불가역적 운명 속에 척박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예술인(藝人)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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