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주 변호사
박노주 변호사

무릇 산 자는 모두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으로부터 생명을 선사받은 자의 피하지 못할 운명이다. 죽음의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그 방식이나 시기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다. 자연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경우도 있다. 모두가 하늘의 뜻이자 운명이다.

죽음에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살아있는 동안 삶과 죽음의 철학을 공고히 할 일이다. 이것이 철학의 진수이자 인생의 의미일 수 있다. 이를 실천한 대표적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다. 그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독약을 마시고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의 길로 떠났다. 진리의 세계나 내세를 확신한 자의 의연함이다.

노쇠하면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큰 축복이다. 그 상태로 너무 길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생각이 육체적 노화에 발을 맞추지 못하면 불행이 심화된다.

사고사의 경우 자연사와는 달리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죽음에 인간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이는 집단적 자기책임의 회피행위일 수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회구성원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정 부분 그 죽음에 영향을 미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한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사회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지속되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고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혐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당당히 대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음을 모르면 삶을 알 수 없다.

죽음 그 자체는 간단하다. 그 과정이 어둡고 두려운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다면 현세의 어떠한 고난에도 자유스러울 것이다. 죽음이라는 아주 믿음직한 도피처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인간이 영생한다면 모두 나태해질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인생과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게으름의 유혹은 죽음의 유혹과 그 근원이 같다. 움직임이나 생각이 없는 무생물로 회귀하는 것이다. 사실상 무생물의 세계가 모든 생명체의 본향일지도 모른다.

 캄캄한 죽음이 배경으로 되지 않으면 현존은 그 형상이 뚜렷하지 않고 가치가 거의 없다. 생명체는 죽음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영원하고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기쁨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삶이 괴로울 때 죽음으로 도피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삶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투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혼란스러운 것을 각오해야 한다. 역경이나 혼란이 없는 완전한 평온을 원하는 사람이 갈 곳은 한 곳-무덤뿐이다. 역경이 없다면 한없이 계속되는 권태의 늪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죽음으로 통하는 문은 아주 가까이에, 그리고 곳곳에 있다. 그러나 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의 문 바로 앞에서도 마치 생명이 영원할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는 게 아닌가. 죽음의 문이 보인다면 모두 거의 죽은 목숨처럼 살아갈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평균연령으로 따지면 죽음의 문까지의 거리를 대충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자기 자신의 경우는 예외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애써 죽음과의 거리를 멀리 잡으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 "나의 생명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라. 더 절박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죽음은 시간을 소중하게 한다. 매일 작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이 좋다.

죽음의 세계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끌려가는 방법과 뛰어드는 방법이 그것이다. 최소한 죽음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의미 없는 상태 이전에 이러한 삶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의식이 먼저 상실되는 것이 가장 불행한 상태다. 이 경우 끌려가는 것이라는 의식조차 없이 끌려간다. 대부분 이러한 상태로 죽음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죽음으로 회피할 때는 최소한 삶과 죽음의 철학을 확고히 한 이후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패배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이 확고하지 않다면 삶과 처절한 싸움을 할 일이다. 패배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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