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법학박사
이선신 법학박사

민주주의는 정치를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생활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환경, 모든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가 추구되고 실천돼야 한다. 즉, 민주주의가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서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민주적인 생각, 민주적인 판단, 민주적인 행동규준 등이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항시 적용되고 실천돼야 한다. 현재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아직도 많이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헌법보다 떼법이 우선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통용되기도 하며,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는 ‘갑질’이 횡행하는 사례도 많다.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철학적 기본원리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다.

먼저 ‘개인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개인주의를 이기주의(利己主義)와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개인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자는 생각에서 발원됐다. 그 기저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한 존중이 자리잡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이기주의는 타인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자 하는 탐욕적 심성에서 비롯된 입장이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개인주의를 터부시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즉,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 전체주의적 습성이 아직도 상당 부분 남아있다. 이는 오랫동안 절대왕정과 중앙집권적 정치 행태를 유지해 온 봉건주의적·권위주의적 잔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집단주의, 전체주의가 항시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공익 우선의 사고가 정의관념에 부합되는 경우도 있다. 사익(私益)과 공익(公益)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사익과 공익 중 어느 법익(法益)을 우선시해야 할지에 대해 합리적인 비교형량이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한 자유롭고 치열한 토론이 허용돼야 한다. 그리고 사익과 공익이 조화롭게 존중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아무튼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존재해 온 집단주의, 전체주의적 습성과 태도를 가급적 지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음으로 ‘합리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합리주의는 ‘비이성적 사고’를 버리고 ‘이성적 사고’를 택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인류의 근대문명과 문화는 모두 합리주의에 터 잡아 이룩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작동하게 하는 모든 제도들도 합리주의적 태도에서 고안된 것들이다. 합리주의를 사회 전반에 정착시키기 위해 고안된 제도적 장치가 바로 ‘법치주의’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이 합리주의를 접하게 된 것은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봉건주의 시대와 잔학한 압제·수탈이 지배하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1945년 해방되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합리주의를 만나게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는 아직도 비합리주의적 요소들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종 불합리한 차별(지역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등)이 횡행하기도 하고, 개인의 능력·성과보다 지연·학연·혈연을 과도하게 중시하기도 하며, 중요한 판단을 무속(巫俗)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랫사람의 합리적 판단을 ‘계급’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못된 상사들도 많기 때문에 "계급장 떼고 얘기하자"는 말도 생겨났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불합리한 요소들 중에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시대에 만들어진 제도와 관행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빨리 이를 떨쳐내야만 한다. 부연하건대,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시키려면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존중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돼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개인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광범한 ‘계몽(啓蒙)’과 ‘학습(學習)’이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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