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우리나라는 유교의 교조로 알려졌다. 동이인의 국가였던 중국대륙 하남성에 위치했던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홍범으로 민중들을 교화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동방은 유교의 교조이며 인의의 나라로 불렸다.

태평지인은 인하다고 했다. 동방인은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궁인이라고 했다. 동이인은 예의를 안다고도 했다. 우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아와 통전에 있는 글이라고 한다.

신라·고구려·백제 왕실의 자제들이 공자학을 공부하려고 같은 시기 631년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삼국은 예기·주역·논어·춘추·좌전·모시·상서 등을 가져와 민중들에게 유교 훈도에 나서기 시작한다. 고려에서도 왕실 자제들에게 유교 교육을 시킨다. 고려는 송나라에서 문묘도·제기도·경서 등을 가져온다. 

해동 공자로 불렸던 최충이 있을 때 고려의 유교는 중흥기였다고 한다. 최충이 죽은 후 오랜 기간 고려는 유교의 쇠퇴 기간이 된다. 자료를 보면 문묘도 형적만 남아 있었다. 그 후 안유가 문묘를 찾아갔으나 처참한 모습에 놀라워하며 공경해야 할 문묘에 사람은 없고 정원에 잡초만 무성하다는 시를 남겼다. 안유는 고려 왕도 개성에 성균관을 중건해 놓는다. 안유에 이어 정몽주도 고려 유교의 부흥에 나섰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 받은 조선은 1406년 성균관을 창설한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서인·북인·동인·남인·소론·노론 등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에 몰두하기도 했다. 퇴계와 율곡의 문인들이었다. 쟁쟁한 유학자들이었다. 유학자 중에는 인천 사람 채봉암도 있었다. 충남 부여 현감을 지낸 채봉암은 유집 17권, 역학 12도해, 독서전보, 성리관규 등의 저서를 남겼다.

권력 쟁탈을 목표로 유학자들 간 분쟁도 있었으나 자식들의 결혼으로 사돈지간이 된 유학자 집안도 많았다고 한다.

유교는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인륜을 주체로 삼는 학문으로 어려운 공부가 아니다. 부자유친·부부유별·군신유의·장유유서·붕우유신의 교육과 문자·예설·심성·이기 등을 교육시키는 학문이다. 향교·서원·사원·서당 등에서 공부했다. 한자를 알아야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다.

학습이 어렵고 문법도 번거로운 한자는 보급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문자라 중국에서조차도 간소한 국문을 사용해 온 지 오래됐다. 갑골문자가 출토된 은나라에서 발생한 문자인 한자는 점획이 복잡하고 의의가 심오해 오랜 기간 공부해도 어려운 문자라고들 한다. 한자는 쓸모없는 문자이고 사람의 두뇌를 피곤하게 하는 공부라는 사람도 많았다.

성균관에서는 유교의 경서를 알기 쉽게 보급하려고 우리 글로 경서를 제작해 보급했던 시기도 있다. 한자와 한문의 전수를 목적으로 창립된 공자회도 있었다.

서원·사원·서당·향교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인도 어려운 논어·맹자·시전·서전·효경·주역·중용·자치통감·사략·소학·대학·동몽선습·유합·천자문 등을 일제 초기까지 아이들에게 교습했었다. 중국·일본·내몽고·러시아 지역 동포 자녀들에게도 교습 과목이었다. 

조선 후기 향교는 변질돼 일종의 계청으로 불렀다고 한다. 향교에서 계를 조직해 운영했던 것이다. 향교 임원과 회원들이 모여 계를 운영하면서 계원의 자녀들이 아니면 향교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게 해 비판도 많이 받았다. 계원의 자녀가 아니면 상한·천자 등으로 부르며 지역 어린아이들을 학대했던 곳이 향교였다는 것이다. 

향교는 지역주민들에게 교육시키려고 건립한 고려시대 교육시설물이다. 향교 임원들에게 교수·훈장이라는 공익 명칭을 줘 교육 시켜 왔던 곳이다. 정몽주가 각 지역 군과 읍에 향교를 건립한 목적이 교육이었다. 인천 향교에서 한자 하나, 경서 한 줄의 교육이 이어지는 건 정몽주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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