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예일대와 하버드대학원 출신의 외국인 스님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했던 현각스님의 한 문장이 제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지식을 머리에 많이 담고 있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 이 얼마나 흥미롭고 나아가 무서운 상황인가?"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섬뜩했습니다. 지식인들일수록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인정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니까요. 그래서 상대편을 비난하고, 자주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흑백논리로 편을 가르곤 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지식인들을 스님은 꾸짖고 계신 거죠. 선과 악으로 가르려면 악으로 규정할 대상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상이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란 점입니다.

예를 들면 서로 다른 장난감을 산 아이 둘이 가게를 나옵니다. 한 아이가 "내 것이 네 것보다 훨씬 좋아"라고 하자, 다른 아이는 "아니야, 내 것이 더 좋아"라고 하며 다툽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언제 다퉜느냐는 듯 다시 친구가 돼 놉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다릅니다. 어쩌면 아이들의 다툼보다 더 치열하고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툼이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우리 편이냐, 아니냐로 이어져 아이들처럼 다시 친구가 되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로 끝을 내기 때문입니다.

어떤 태도로 임해야 인간관계를 적대적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로 바꿀 수 있을까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에서 그 지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학교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을 연구하는 ‘심산사상연구회’에서 김 추기경에게 ‘심산상’을 수여했습니다. 상을 받은 후 추기경은 심산의 묘소로 가 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유학자인 심산에게 절을 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그런 비판에 추기경은 "심산 선생은 민족 지도자인데 내가 절한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됐다는 거지?"라며 오히려 반문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추기경의 큰절은 마치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어떤 ‘사실’에 대한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돌아가신 분을 존경하는 예우의 표시로 절을 했다면 그 행동을 우상숭배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이런 김 추기경님 일화를 전해 들은 현각스님은 그때부터 그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사실 현각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 계통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후 불교 서적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결국 출가로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어느 날 현각은 뉴욕의 한인성당을 방문한 김 추기경을 만났다고 합니다. 현각을 본 추기경은 "현각 같은 사람이 성당을 떠나서 안타깝소"라고 말하자, 현각은 "저는 떠나지 않았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이 생명입니다"라고 알 듯 모를 듯한 선답을 했습니다. 그때 추기경은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두 거인(巨人)의 대화에는 묵직한 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기준을 적용하며 삶을 꾸려 나갑니다. 그러나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려면 무엇보다도 ‘남의 삶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의 기준에서 그를 헤아리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두 거인에게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현각스님의 경고처럼, 지식인들의 대인관계가 갈등과 분열로 이어지는 이유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배워 온 지식과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기준’만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만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머물게 하고, 울타리 밖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해 버리곤 합니다. 이제까지의 제 삶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저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돼 무척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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