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전)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전)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중광스님과 우리나라 대표화가 중 한 명인 장욱진은 나이 차이가 18살이다. 나이 차이로 말하면 아들이나 제자뻘 정도이나 중광과 장욱진은 말하자면 선화(禪畵)의 동반자 관계였다.

장욱진 화백을 기리는 글을 보면 지인들은 그를 원효(元曉)에 비유한다. 무애(無碍) 사상을 실천했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불교와의 인연도 깊었다.

환갑이 지난 1979년도에 44살이던 중광을 처음 만났다. 고수는 서로 알아보는 것인가 만나는 첫날부터 둘은 통했다.

잘 알려진 대로 어느 날 장욱진은 갑자기 중광을 앉혀놓고 초상화를 그려줬다. 까탈스럽기 그지없는데다 사람멀미를 하는 장욱진이 특정한 누구의 초상화를 그려준 예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특별했다. 

둘은 술을 마시며 말 없이 주거니 받거니 붓을 옮기며 합작도를 그렸다. 중광이 산을 그리면 장욱진이 산 위에 까치를 그리고, 중광이 바위를 그리면 장욱진이 도인을 얹었다. 서로 마음만 동하면 되었지 하여 사인은 남기지 않았다.

그런 그림 몇 점이 1983년에 발간된 「The Dirty Mop」이란 영문화집에 들었다. 그것을 본 지인들이 저런 쓰레기 파계승과 같이 그림을 그린다니 하며 장욱진을 몰아세웠다. 그래서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생전 장욱진의 부인은 중광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중이 대낮에 술을 처먹고 미친 짓을 하고 다닌다는 이유였다. 장욱진의 부인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중광도 장욱진 화백을 가장 존경한다며 극진하게 대했다. 정작 장욱진에게는 가지 못한 초상화 두 점을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데 장욱진이 그린 자화상과 너무도 닮았다. 그 중 한 점에는 "세월밖에 살아라, 욱진도인"이라고 쓰여있다.

장욱진 화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린 그림이 분명한데 장욱진 화백과 사이가 멀어진 것을 미안해 했음이다.

"천애(天涯)에 흰 구름 걸어놓고/ 까치 데불고 앉아/ 소주 한 잔 주거니 받거니/ 달도 멍멍/ 개도 멍멍."

이는 중광이 욱진화백에게 바친 불후의 명시(名詩)다. 이 시화(詩畵)도 존재한다.

장욱진 화백이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1978년 이후로 전해진다. 다분히 중광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술을 너무 좋아하고 잘 마셨지만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공양(1978년)이란 그림이 술에 취해 그린 몇 안 되는 그림으로 전해진다.

장화백이 12년 먼저 중광을 떠났다. 아마 지금쯤은 둘이 천애에 걸린 구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지금 뭐하는지 모르고 사는 중생들을 내려다보며 까치소주를 마시고 있지나 않을까.

둘 다 모듬에 정직이 최고라고 했다. 기교를 부리거나 정직하지 않은 그림은 표시가 난다고 했다. 어른들도 낄낄대며 좋아하는 그림, 일필취지로 그은 붓질, 여백에서 살아있는 기(氣)의 그림을 그들이 아니고서는 누가 더 그릴 수 있을 것인지 아쉬움만 남는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런 위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세태가 인간을 만든다고 하는데 형식과 제도를 중시하고 계층화된 사회에서 영혼의 자유란 누리기도 표현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술 마시고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며 심플한 그림과 심플한 삶을 살았던 장욱진과 무애의 삶에 더없이 충실했던 중광은 나이 차이를 넘어 짧지만 깊은 우정을 남겼다. 장욱진 화백은 진정 중광을 미워하고 잊었을까. 장화백의 유품에서 병풍, 그림, 도자기 등 중광의 작품이 열세 점이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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