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계봉 시인
문계봉 시인

임인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참으로 숨이 가쁜 한 해였습니다. 수년째 이어온 코로나19의 집요한 공세 속에서도 대통령이 바뀌고, 여야가 바뀌고, 지방자치 정부의 수장과 의원들이 바뀌었습니다. 시민들은 바뀐 정치 지형 속에서 이전과는 뭔가 달라진 삶의 모습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 지 6개월 만에 민생은 더욱 힘겨워지고 정치의 난맥은 더욱 깊어졌으며, 보복과 정쟁의 기시감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늦가을의 어느 날,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10·29 참사로 인해 모든 국민은 ‘익숙한’ 트라우마에 또다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국민은 언제까지 무책임한 정부와 이기적인 정치인들의 무관심 속에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며 삶을 힘겨워해야 하는 걸까요? 이미 한쪽으로 경도된 정치 검찰을 앞세워 지난 정권의 흠집 잡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정부·여당과 새로운 정치적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 채 낡은 형태의 ‘쪽수 정치’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몽니 정치만 반복하는 야당, 과연 이들에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맡겨도 되는 걸까요?

검은 호랑이의 기상은커녕 병든 고양이의 한숨 같은 무미하고 건조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임인년의 황금 같은 시간은 허비됐고, 허비되는 중입니다. 지지율이 바닥인 정부는 한결같은 구설과 설화(舌禍)로 인해 국민에게 희화화되기 일쑤고,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각 부 장관과 기관장들은 납작 엎드린 채 자신의 임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기막힌 현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이곳이 영화 배트맨의 배경인 고담시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배트맨과 같은 영웅이 없습니다. 설사 있다고 해도 우리의 문제를 영웅 한 명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약하게 고장 난 시대를 바로잡고 허투루 가던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았던 건 바로 묵묵히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던 수많은 백성(민중)이었다는 것은 역사가 보증하는 진실입니다. 

현대사에만 한정해도 우리는 3·1운동과 4월 혁명, 5·18과 6월 항쟁, 그리고 6년 전 겨울의 촛불 항쟁 등 단결과 연대의 숭고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결한 국민, 조직된 민중을 부도덕한 위정자들은 가장 두려워합니다. 국민이 권력을 무서워할 일이 아니라 권력이 국민의 눈치를 보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소중한 가르침이고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가치입니다. 

일단 정치적 허무주의와 무관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보기 싫은 뉴스도 봐야 하고, 힘들고 귀찮아도 국민의 당연한 권리가 침해되는 현장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힘든 이웃과 주변 동료의 어려움에 공감해야 합니다. 저 바람 찬 가두에서, 고공에서, 노동 현장에서, 시장에서 외치는 이웃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는 그들의 싸움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강하게 하는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 사이에 틈이 생기고 불신의 장벽이 생기고 소통의 장벽이 생길 때, 어려운 이웃들의 현실은 곧 나의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대를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너무도 신산했던 임인년의 질곡들을 떨쳐내고 다가올 한 해의 희망을 조형할 때입니다. 이제는 눈물보다 웃음에 관해, 슬픔과 절망보다 기쁨과 희망에 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중략)/ 두 눈을 뜨고 어둠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곽재구 ‘희망을 위하여’ 중-

한 장 남은 달력의 휑한 흔들림 속에서 겨울은 깊어 갑니다. 서로의 온기가 더욱 절실할 때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어려운 이웃들의 잠자리와 안온한 아침 식탁을 염려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의 작은 사랑은 수만 볼트의 전기가 돼 세상을 환하고 아름답게 밝혀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위에 소개한 시처럼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는 굳건한 연대가 이 겨울과 혹독한 시대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걸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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