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
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

2022년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에 굴업도를 새삼 소환하는 것은, 지난 초여름 굴업도 개머리능선에서 바라봤던 서해바다의 일몰 풍경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굴업도, 이름만 들어도 인천사람들에게는 공연히 부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섬이다. 

1995년 그 한 해의 뜨거웠던 ‘핵폐기장 건설 반대’라는 함성 뒤에는 덕적면 주민들의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채 저물기도 전에 ‘서해 굴업도 관광단지 내 골프장 건설’이라는 악재를 또 만나게 됐다. 2014년 7월 사업을 철회하면서 7년여의 긴 싸움은 끝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육지에서 불어온 태풍으로 덕적군도 주민들의 공동체는 균열돼 불신의 상처만이 뼛속 깊이 남겨졌다고 한다. 아무리 깊은 상처도 세월을 이겨 내지는 못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지난 6월, 1박 2일 일정으로 굴업도에 갔었다. 나이가 들어도 여행길에는 막연한 설렘이 있다. 더군다나 섬으로 여행이라니, 인천여객터미널에서 덕적도까지 가는 길은 창밖의 바다와 뱃전에 부딪는 파도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덕적도에서 내리자마자 출항을 준비하고 있던 ‘나래호’를 타고 굴업도로 향했다. 그런데 덕적도에서 굴업도까지 가는 뱃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덕적군도의 유인도를 모두 거쳐 2시간가량을 배 위에서 보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날 나올 때는 반대 방향으로 또다시 덕적군도를 배 안에서 감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배 안의 시간표를 보고, 세심히 알아보지 않고 여행일정을 잡은 탓을 해야만 했다.

오늘, 미리 내일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법. ‘나래호’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올라탔다. 짐칸에서 온몸으로 섬의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넘어 숙소로 향하는 길의 풍경은 한 폭의 파노라마와 같다. 슬픈 전설을 품은 채 물 위에 떠 있는 선단여와 해 질 녘 개머리능선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 언어의 빈곤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자귀나무 아래/ 바람맞은 잎들이 모여듭니다/ 엎드려, 여름날을 생각하네요//

저렇게,/ 바다처럼 하늘은 깊어/ 해 질 때면 푸르스름한 몸살을 앓고//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어부의 젊은 아낙이/ 무슨 악기의 곡조가 되는 등성이/ 그래서 달뜨면/ 헤진 치마끈을 풀어/ 모래톱 가득 출렁이는 고요와 한 몸이 되네요//

물 건너 섬집/ 밥 짓던 비린 저녁을 돌아다보네요//

음계(音界)에 없는 적막의 현(弦)으로/ 억새꽃 하얀 노래 부르다/ 엎드려 고독을 토하고 있어요."

심응식의 ‘굴업도’다. 흥성거렸을 여름날을 뒤로하고 맞이하는 늦은 가을, ‘억새꽃’마저 ‘엎드려 고독을 토하고 있는’ 적막감, 거기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어부의 젊은 아낙’의 이야기가 가슴 시리다. 제주도 해녀들의 슬픔을 담고 있는 ‘제주장불’ 그리고 ‘남대문바위’, ‘덕물산’, ‘연평산’ 등 굴업도의 지명에는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연들을 담고 있다.

이세기 시인은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에서 "섬은 섬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개발 또는 주민 편의라는 미명 아래 우리의 섬들은 매일 ‘공사 중’이다. 그런데 정작 개발 주체는 주민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배제해야만 수월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제 다시 우리는 섬을 생명의 눈으로 바라봐야 할 때다. 이세기 시인의 글로 마무리한다.

"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가마우지와 갈매기만 오롯이 사는 곳이 아니다. 우물이 있는 섬마다 마을이 있고 당산을 모시고, 대대로 세거(世居)한 집안에는 조상의 신주를 모신 감실(監室)이 있다. 고유의 예절과 공동체의 섬 문화를 꽃피우며 살아왔다. 두레 굿이나 배치기 노래 등 섬마다 특색 있는 마을 대동계와 갯문화가 있다. 뒤란에서 정한수를 떠 놓고 비나리를 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사람이 사람의 길을 기원하고 우주의 뭇 생명을 소원하는 일만큼이나 종교적인 것은 없다. 나는 가끔씩 섬사람들에게서 영성을 발견한다. 미물조차 허투루 내쫓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진 고난의 삶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낳게 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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