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상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박병상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인천 연수구청 주변 먹자거리에서 소암마을의 아파트 단지로 가려면 앵고개를 넘어야 한다. 도로명주소는 앵고개로라고 표기한다. 걸어서 40분 안팎이지만 쌀쌀하니 택시를 이용할 때가 많다. 버스 노선이 많지 않고 그나마 자주 오지 않으니 택시를 찾는데, 앵고개를 아는 기사는 거의 없다.

2014년 지번에서 도로명으로 주소를 바꿔 사용할 때 많이 어색했다. 행정동 이름으로 묶이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듯했다. 8년이 지나가면서 주소는 기억하지만 여전히 편안하지 않다. 도로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살가울 텐데, 아무런 상식이 없는데 느닷없이 확인한 도로명주소는 낯설었다. 앵고개? 예전에 앵두나무가 많았을까? 그랬다면 도로명이 된 앵고개에 앵두나무를 심었다면 좋을 텐데. 아쉽다.

사실 앵고개는 해안도로에서 현재 동춘역 방향의 연수구 아파트 단지를 연결하는 넓은 도로가 아니었을 것이다. 연수구 일원이 한적한 농촌이던 시절, 용현동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며 청량산 기슭을 넘던 고개였겠지. 그때 앵두나무가 많았을지 모르는데, 지금 그 길은 한적하다. 식당 사이를 지날 따름이다. 앵고개는 자신의 역사를 잃어간다.

인천에서 괴나리봇짐을 멘 젊은 선비가 과거 보러 걷던 길은 흔적을 남기지만, 계획도로와 건물에 이리저리 끊기고 막혔다. 향토사 연구자를 제외하고 실체를 기억하는 시민은 요즘 거의 없다. 제물포역 북광장에서 인화여고로 이어지는 골목은 괴나리봇짐 기억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골목은 주민에게 어떤 이야기도 전하지 못한다.

배다리에서 신포시장으로 넘어가는 싸리재는 어떤가? 그 길을 지나는 시민은 싸리재에 얽힌 이야기를 얼마나 기억할까? 300만 가까운 시민 중에 싸리재를 걸으며 개항 관련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더러 봤을 것이다. 인천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는 건물을 기억할 것이다. 한데 인천시민 중 싸리재가 재개발로 사라지거나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도원동을 지나는 도원고개에 복숭아나무가 있었을까? 지금은 쏜살같이 지나는 아스팔트일 따름이다. 하긴 복사골을 내세우는 부천시도 복숭아나무 한 그루 남기지 않았다. 그저 지하도로에 그림만 있을 뿐인데, 앵고개도 비슷하다. 하지만 싸리나무 없는 싸리재는 다르다. 일제강점기부터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인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담고 흐르는 길이다. 한데 대다수 시민이 모르는 재개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지역 정서를 간직하는 사람은 대체로 재개발을 부정적으로 본다. 개발 이익에 치중하는 재개발로 지역 문화와 역사가 무참하게 파괴되는 경험이 쓰라리기 때문이다. 문화재가 산재한 싸리재 일원이므로 재개발에 앞서 문화재위원회가 열린다고 하니 속단하지 않겠지만, 불안하다. ‘개항의 오랜 역사가 담긴 싸리재 거리의 많은 건물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현실이므로.

유럽의 많은 유서 깊은 도시도 필요하다면 재개발한다. 하지만 시민과 관료 그리고 개발업자까지 원칙을 반드시 지킨다.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는 원도심 건물은 외부를 엄격하게 보전할 뿐 아니라 거리의 모습도 바꾸지 않는 것이다. 확장이 필요하다면 외곽을 택하기에 옛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은 보전되는 역사와 문화를 만끽하고 돌아간다. 개항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고 있는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는 싸리재에서 시민은 자신의 정체성을 느낀다.

세계 초일류 인천은 시민이 소외되는 재개발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체성을 보전하면서 철저한 고증으로 원칙 없는 개발로 헝클어진 싸리재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재개발이라면 세계에서 하나뿐인 초일류가 빛을 발할 것이다. 그 과정에 시민의 투명하고 무게 있는 참여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 시민 참여는 정체성의 뿌리가 지역에 깊게 내리게 한다. 싸리재 재개발 논의 상황이 궁금하다. 돈벌이를 위한 상가 재개발과 달라야 한다. 개발자의 이익보다 시민이 자부하는 세계 초일류 인천으로 거듭나기 위한 대안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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