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웅 변호사
한재웅 변호사

막스 베버는 국가 권력의 근원은 물리적 강제력이며 국가는 일정한 영토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 인간 공동체라고 했다. 국가 권력에 관여하거나 권력의 배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일체 노력을 ‘정치’라고 할 때, 정치인은 유일하게 허용된 강제력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정치인은 강제력 즉,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므로 다른 영역과는 다르게 특별한 자질과 윤리가 요구된다고 한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구분되는데 ‘책임윤리’는 자신의 정치적 행위나 선택에 대해서 예측하고 그로 인한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에게 ‘정치적 책임’을 논할 때 ‘책임’은 막스베버가 말한 ‘책임윤리’와 같은 취지의 책임이다.

정치인들의 책임이 정치인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윤리라고 한다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부과되는 책임은 법률적 책임이다. 국가질서를 유지하려 법률과 규정이 존재하며 누구라도 법적 질서에 복종할 책임이 있다. 여러 법률의 수범자가 각기 다르므로 사회 구성원의 역할에 따라서 부과되는 법률적 책임의 내용이 다르겠지만, 법률적 책임이 기존의 법규와 제도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보다는 절차와 과정에 대한 의무를 부과한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한다.

국가조직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관료체제를 구성하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기능하는 일반 공무원은 직무상 부과된 법률과 절차에 따라서 업무를 수행하면 다른 책임을 진다고 볼 수 없지만, 정치인이 국민적 선택을 받아 국가조직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면 법률적 책임에 더하여 정치적 책임을 진다고 보아야 하고 책임의 범위는 권한의 범위에 비례한다. 정치적 책임은 국가 작용에 대한 성공과 실패 등 결과에 대한 책임을 포함한다. 또, 작위 뿐만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부작위에 의한 결과도 당연히 책임 범위에 포함한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이후 2달이 다 돼간다. 이태원 참사는 참사 당일 대응에 대한 부분과 참사 이전에 이를 대비하지 못한 부분으로 구분해 살펴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참사 당일 수십 건의 신고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문제는 일선 공무원들이 기존의 법규나 제도에 따라서 직무를 수행했는지가 문제로 법률적 책임이 있는지 쟁점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 재판도 진행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단 결과를 지켜봐야겠다.

그런데 참사 이전에 대비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책임은 누구 하나 시원하게 나서는 사람이 없다. 참사 이전에 이와 같은 사고를 대비해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야 하는 책임은 정치지도자에게 있다. 비록 법률에 이태원 참사를 예방하는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정치인이라면 이와 같은 참사를 사전에 대비할 정치적 책임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태원 참사를 ‘어쩔 수 없는 사고’로 감내해야 할 만큼 후진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매뉴얼이 없었다’, ‘예상하기 어려운 사고였다’라는 말은 정치 지도자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며, 자신의 무능력을 자인하는 발언에 불과하다. 여당 일각에서 나오는 수사 등 진상조사가 진행 중이니 책임을 유보하자는 의견은 정치인의 정치적 책임이 아니라 법률적 책임의 범위에서 말하는 것이다. 정치인의 책임을 법률적 책임의 범위로 축소하려는 시도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국민 전체가 충격에 빠질 정도로 참혹한 참사를 대통령의 사과나 유감표시로 정치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사고를 미리 대비하지 못해 참혹한 사고가 있었다는 결과론에 더해 참사 이후 적절하지 않은 언행으로 실망을 주기도 한 것에 비춰 최소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퇴해 정치인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막스 베버는 정치 지도자는 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지는데 명예가 있다고 했다. 정치 지도자가 정치적 책임은 외면하고 법률적 책임 뒤로 숨는 것은 비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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