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누구나 사랑을 원하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너와 나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지는 배우지 못한 채 우리는 자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능적인 사랑을 먼저 떠올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능적인 사랑은 자칫 나와 너 모두를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올바른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은 곧 지혜입니다. 지식은 배워서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실천이 따라야 하니까요. 내가 사랑을 줌으로써 상대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런 지혜 중의 하나는 사랑할수록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일간지에 실린 기사가 기억납니다. 미국의 어느 부둣가에 여객선이 도착해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도중 한 여성이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선원들은 그녀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무책임하다며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이 여성이 두 번이나 물속에 떠올랐다가 잠겼는데도 선원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힘이 완전히 빠진 후에야 선원이 물속으로 들어가 축 늘어진 그녀를 구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왜 처음부터 빨리 구해 주지 않았느냐며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 선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습니다. "모르시는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물에 빠져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쓸 때는 어느 장사가 구하러 들어간다고 해도 빠진 사람의 힘에 눌려 같이 죽게 됩니다. 그래서 기다린 것입니다."

죽을 사람을 살린 저 선원처럼 우리도 알아야만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요. 그러려면 배워야 합니다. 사랑의 올바른 방법을 배운다는 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돼 줄 겁니다. 그것이 행복의 문을 여는 시발점이 되니까요.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에는 작자 미상의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서도 왜 이리도 아파하는지에 대한 사유가 무척 돋보이는 시입니다.

"(…) 꽃을 짓이기며 얻은 진한 진액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찾아보지 못하듯/ 좋아하는 사람 곁에 혹처럼 들러붙어 있어도/ 그 사람과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꽃과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눈앞에 있을 때 굳이 멀리 두고 보듯 보아야 하고/ 멀리 있을 때 애써 눈앞에 두고 보듯 보아야 한다.// 누구나 날 때와 죽을 때를 달리하는 까닭에/ 꽃과 꽃처럼 아름다운 이에게 가는 길은/ 참으로 이 길밖에 딴 길이 없다 한다."

사랑의 올바른 방법이 이 시에 온통 다 들어있는 듯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별의 아픔으로 피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혹처럼 들러붙은’ 우리의 그 사람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의심을 했고, 눈에 보이면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해서 그랬던 겁니다. 그렇게 해도 그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지혜를 몰랐던 겁니다.

이제야 알 듯싶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요. 사랑하면 할수록 더 예의를 갖춰서 그를 대해야 함을요. 이제부터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비록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도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예의를 갖춰 표현하는 지혜가 몸에 배도록 노력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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