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 산곡남중학교 교장
전재학 인천 산곡남중학교 교장

예능과 예술, 어떻게 다른가? 국어사전에 따르면 예능(藝能)은 ‘연극이나 영화, 음악, 미술, 무용 등의 연예 분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정의돼 있고, 예술(藝術)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인간 활동과 그 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기술돼 있다. 이는 entertainment인 예능과 art라는 예술의 영어 단어로도 구분된다.

 그렇다면 예능과 예술을 수업(授業)에 적용해 보자. 교사의 수업은 예능과 예술 어디에 위치할까? 예능 쪽에 치중하면 재미는 있겠지만 남는 것이 없고, 그렇다고 예술 쪽에 치중하면 흥미를 잃을 듯하다.

 K-POP이 거둔 성과를 수업에서 얻을 수는 없을까? 이런 기대는 단순히 ‘보고 듣는 즐거움’만으로는 한 시간을 몰입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 음악이 가진 소리의 예술성, 미술이 지닌 형상의 예술성, 스포츠가 제공하는 역동의 예술성을 예술 장르에만 가두지 않고 예능으로 옮겨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할 수는 없을까? 수업은 이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서 정의한 바처럼 예능과 예술의 차이를 논하는 관점은 다양하다. 흔히 인식의 수준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수업이 목표하고자 하는 ‘생각하는 힘’의 여부로 좁혀 보자. 예능을 보는 내내 보여 준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긴장’, ‘집중’, ‘추리’, ‘비판’, ‘예측’, ‘교훈’, ‘감동’ 등과 같은 단어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잠시 장면을 놓쳐도, 식사 자리를 겸해도, 수다를 떨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즐길 수 있다. 이는 ‘부담 없음’이 준 덕분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을 대할 때는 전혀 다르다. 허튼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딴짓을 할 수도 없다. 고로 생각이 많아진다. 남는 그 무엇을 음미해야 하고 여운을 즐기는 시간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탐색하는 시간, 생각과 함께하기 마련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큰 과업이다. 그러니 당연히 힘들다. ‘다큐’와 같은 심각한 내용이면 소수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 채널을 돌리기 마련이다. 즉, 일부러 수고를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은 즐기는 그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이는 개인의 자유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 바로 ‘생각’하는 일이다. 주는 대로 받아 먹는 예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연이어 질문이 꼬리는 잇는 태도를 생각해 보자. 이는 읽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읽어 내는 것이니 흡입력 있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고, 빼앗기는 시간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니 에너지를 더 소비해야 한다. 수업이 성공하려면 예능적 태도에 머물지 않고 예술적 태도까지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이 수업에 임할 때 예능을 시청하는 자세를 갖게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갖게 할 것인가? 이는 전적으로 교사에게 달렸다. 그렇다고 반드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두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예능을 대하듯 수업을 하되, 결국 남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한마디로 탐구(探求)하는 자세다. 끌리는 것이 아니라 끄는 것이다.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가벼움에서 깊어짐이다.

 교실에서는 예술이기만을 바라는 교사, 예능이기만을 원하는 학생이 공존하면 수업은 부조화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업의 무게감을 좀 더 가볍게 하자. 토크쇼에서는 사회자 한 명으로 시청자를 웃고 울릴 수는 없다. 사회자 격인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져다 쓸 수 있는 것-다양한 교수 전략, 맞춤형 연출, 시청각 자료, 온·오프라인 연계 블렌디드 학습-을 밀도 높게 세팅하는 일이다. 아이들을 스스로 예술작품의 움직이는 소재가 되도록 하자. 이를 ‘자기주도적 학습’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수업이 즐거움을 넘어 아름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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