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어릴 적 집 앞에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화교였다. 어린 나이에 필자는 화교들의 중국 언어에 많은 호기심을 갖고 중국식 발음으로 중얼중얼 하곤 했다. 화교들의 발음으로 중얼중얼하면서 동네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화교 누이가 중국식 나무 상자 배달통으로 음식 배달을 하고 오면서 마주했다. 중얼중얼하다 멈추고 누이를 보면서 웃음을 짓고 있는 나의 모습에 마음이 상했는지 평소와 다른 얼굴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던 추억이 있는 화교들이다. 

 인천으로 찾아온 시기는 150여 년 전부터다. 상업 분야에서 덕목을 체득한 화교들도 많았다. 중국에서는 상품 한가지를 한 달 동안 판매하는 제도가 있었다. 각 지역 특산품을 판매하는 장날에는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꽃·잠사·비단·부채·향료·칠보·계피·약초·술 등을 한달 동안 집중해 판매하는 시장이다. 각 지역 상인들이 모여 상품에 대한 가격과 정보들을 교환하기도 했다. 기주성으로는 약제상들이 모였다. 봄·가을에 약왕묘에 제례도 올린다. 중경에는 쌀 시장·광동·상해 지역은 온갖 상품들이 모이고 정정지역은 면직물·곡물·가축이 모였다. 협서성에도 가축 시장이 발달된 곳이다. 중국 북경·하남·동구(직례)·서구(산서)·청주·주촌(산동)지역으로는 제례와 관련된 상품들이 모여 판매됐다.

 중국은 시장제도가 오래된 곳이라 상인들의 상술과 신용들이 발달했다. 인천으로 온 화교들 중에는 본국에서 체득한 상술과 덕목을 갖춘 화교 1세대가 많았다. 낯선 인천에서 화교들은 고향사람들끼리 모여 친목과 회의를 했다. 생활하면서 일본 상인들과 경쟁하고 다툼이 늘어나자 화교들은 화교협회를 조직한다. 화상협회→중화상무협회→중화 총상회→화상상회로 몇 차례 개칭했다. 지금 어떻게 조직됐는지 모르나 우리의 상공회의소 같은 화교들의 단체였다.

 고향 중국을 떠나 인천에서 새로운 정착생활을 시작한 화교 1세대들은 본국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며 생활했다. 중국은 영혼에 대한 문학이 고대부터 전해온다. 문인과 시인들이 소재로 많이 다뤘다. 이러한 영향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상이 됐다고 한다. 화교들도 효제의 의의를 실천하며 생활했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공자의 뜻을 받들고 효를 실천했다. 중국 고향에 남아있는 조상의 묘와 부모를 떠나 인천으로 찾아온 화교들은 조상에 대한 제례를 바쁜 생활에도 잊지 않고 효를 실천한 것이다. 공자의 아들 공리(백리), 손자 공급(자사), 증손자 공백(자상) 등 공자 일가들이며 제자들이 공자 학당에서 공부하면서 공자의 뜻을 널리 알리게 되면서 충군사상보다는 공자의 윤리사상을 생활 근본으로 중시해 온 중국인들의 생활문화였던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에 머물러 가족들을 보살핀다 하여 조상의 영혼 존재를 굳게 믿었다. 부모가 효의 끝이라 해 조상의 제례가 계속돼야 한다는 공자의 교시를 실행해 왔다는 것이다. 효를 실천하며 생활하던 중국인들은 이기주의가 보이기 시작한다. 맹자가 있었던 시기에 이기주의가 더욱 팽배했다. 맹자가 분개해 양해왕에게 이기주의를 강력하게 통격할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이기주의가 있었다.

 화교들도 일본인들과 상업·농업분야에서 경쟁하다 보니 실리를 추구하고 이기주의 행동도 했다고 한다. 중용을 모범하여 중용적 사상을 가지고 감정의 이면을 조화하면서 실리를 추구해 왔다. 상업적으로 신용 있는 모습을 화교 1세대들이 보여왔다. 인천에서 생활하며 일본 상인들과 경쟁해야 했으므로 신용이 큰 자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인내력이 강하다. 굴욕을 참는다. 모이면 강하다는 것을 체득한 중국인이고 화교들이다. 의식주를 검소하게 하고 재물을 모으는 것을 위주로 생활한 화교 1세대들의 생활 문화를 장점으로 봤다. 단점도 있으나 접어둔다. 어릴 적 화교들의 중국옷을 즐겨 입던 모습을 지금은 볼 수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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