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겨울이 춥게 느껴지는 양평군. 매서운 추위를 보상이라도 하듯 밤새 내린 ‘눈’이 양평읍 오빈리 남산에 소복이 쌓여 ‘눈’을 꽤나 즐겁게 한다.

고동색 개량 한복 차림의 점잖은 남성이 벼루에 먹을 갈았다. 골라낸 붓에 먹물을 먹이더니 하얀 종이에 망설임 없이 검은 글씨를 ‘그려’ 낸다.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다.

바다 건너 제주도가 고향인 남성의 호는 창봉(滄峰). 그에게 서예를 알려 준 첫 스승이자 인생 나침반인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선생이 지어줬다.

창봉 박동규 서예가는 스스로 스승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여러 선생님의 다양한 가르침을 받아 견문을 넓혔고,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우뚝 섰다.

그의 작품을 보면 좋은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배출된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다음은 창봉 박동규 서예가와 일문일답.

-서예를 업으로 삼게 된 기회가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붓을 잡았고, 이후 서예에 흥미를 느껴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서예 특활반에 들어갔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당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김시현 교감선생님의 특별지도를 받으며 서귀포에서 열린 학생 휘호대회에 참가했다. 서예에 대한 마음이 느껴졌는지 교감선생님께서 대회 전날 20세기 한국 서예의 거장이라고 하는 소암 선생님과 만남을 주선해 주셨다. 이때만 해도 절을 올려 인사드린 소암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졸업한 뒤 친형의 페인트 사업을 함께하며 재능을 살려 간판에 글씨를 쓰고 벽화를 그리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러 간 집주인 사모님이 아들로 삼겠다며 유독 잘 챙겨주셨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욱 마음을 쓰며 그 집 일을 했고, 마무리 단계쯤 집주인께 인사를 드렸는데 소암 선생님이셨다.

깜짝 놀라 사모님께 과거 선생님과 인연을 이야기하며 서예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 흔쾌히 댁 후원에 집을 지어 주시며 글씨를 지도해 주셨다. 문하에 들어간다는 말 그대로 선생님 댁에 머물면서 공부하는 대단한 영광에 크게 감동하고 감사해 주경야독하며 군대 가기 전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청성사달 영문일창(淸聲四達 令聞日彰)’ 청렴하다는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좋은 소문이 날로 빛난다는 뜻이다. 박동규 서예가가 기호일보 창간 35주년을 축하하며 새해 전달한 문구다.
‘청성사달 영문일창(淸聲四達 令聞日彰)’ 청렴하다는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좋은 소문이 날로 빛난다는 뜻이다. 박동규 서예가가 기호일보 창간 35주년을 축하하며 새해 전달한 문구다.

-소암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해군 입대 전 소암 선생님은 나라가 필요로 할 때 나를 버릴 마음가짐이 돼야 한다는 뜻인 ‘호국즉아(護國卽我)’를 써 주시며 군생활 동안 늘 몸에 지니라고 하셨다. 물에 젖지 않도록 미리 비닐에 싸서 입영했지만 소지품을 검사하던 조교에게 걸렸다. 다행히도 글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자초지종을 들은 뒤 나에게 부대에서 필요한 글씨 작업을 맡겼다. 소암 선생님과는 군대에서도 편지로 소통하며 지도받았다. 선생님께서는 면회까지 오셔서 제자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셨다.

제대한 뒤에도 선생님께 서예를 배웠다. 창봉이라는 호도 소암 선생님이 내려 주셨다. 첫 작품을 선보일 때 쓸 호가 필요하자 선생님은 먼 바다를 바라보시며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창봉’이라고 지어 주셨다.

이후 1985년에 학문의 지평을 넓히고 싶어 선생님과 의논 끝에 서울로 올라갔다. 공항까지 배웅 나오신 선생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불러 세우시고 "너는 제주도 사람이다.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말라. 제주도는 세계다"라고 당부하시며 제주 사람으로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지내라고 하셨다.

나중에 서울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지인과 대화 중 호가 한라산을 뜻한다고 일러줬다. 큰 바다의 봉우리, 제주도의 한라산을 가리킨다는 말을 듣고 선생님의 당부가 생각났다.

논어(論語) 구(句) 혼서(2009년 작).
논어(論語) 구(句) 혼서(2009년 작).

-고향을 떠나 어떤 활동을 했나.

▶서울살이를 시작한 뒤 머물게 된 집주인이 서예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소개를 받아 찾아간 동방연서회는 한눈에 봐도 서예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다. 그 중심에 여초 김응현 선생님이 계셨다. 수강생들에게 직접 체본을 써 주며 서법과 서예 이론을 함께 지도하셨다.

사실 제주 서귀포에서 소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도 여초 선생님의 명성을 종종 듣곤 했다. 소암 선생님이 나의 유일한 스승이라 생각했기에 다른 선생님을 모시는 일은 무척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소암 선생께서는 오히려 다양한 서법 이론을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다. 그렇게 여초 선생님을 두 번째 스승으로 모셨다. 아울러 구당 여원구 선생님께 전각을 익히고 매정 민경찬 선생께 그림을 배우며 견문을 넓히려고 노력했다.

당시 스스로 느끼기에도 실력이 성숙기에 들어서서 서예학원도 차리고 여러 대회에 참가했다. 몇 차례 입선 끝에 1988년 KBS 전국휘호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같은 해 서예대전 전각 부문 우수상, 동아미전 특선 그리고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특선을 했다. 당시 대회가 많지 않아서 한 해 여러 번 입상하다 보니 세간의 관심을 받으며 초대 작가가 됐다.

-중국 유학을 기회로 중국 작가들과 여러 번 전시회를 진행했다고 안다.

▶서울에 올라가기 전부터 서예 본토인 중국에 대한 열망을 가졌던 터라 유학을 결심했다. 서예가로서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던 중 곡부서당 서암 김희진 사부께 같이 공부했던 민경삼 교수가 중국 남경대학교에 유학을 간 뒤 내 도록인 ‘금니법화경전 창봉박동규서집’을 남경예술대학에 소개했다.

그의 도움으로 박사과정을 밟으러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2002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남경박물원 초대로 창봉박동규서법전을 가졌고, 1년 뒤 당시 지도교수인 황돈(黃惇)교수와 세종문화회관에서 ‘황돈 박동규 중한양인서법전’을 열었다.

이후 황돈 교수 소개로 드라마 ‘서성 왕희지’의 감독이자 평론가인 주상림(周祥林)과 인연을 맺으면서 주상림 작가와 2011년 제주도문예회관, 인사동 한국미술관, 베이징 영보재에서 서화 양인전을 열었다. 고향인 제주와 서울, 중국에서 진행한 전시회라 뜻깊었다. 한중 서화 양인전을 계기로 이후 여러 중국 작가들과 여러 차례 전시를 진행하며 한중 예술 문화를 교류했다.

-기억에 오래 남는 작품은.

▶금니법화경전이다. 순금을 갈아 만든 금니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1년 6개월간 예서로 적어냈다. 족자 형태인 작품 길이만 320m다. 예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법화경 사경을 해 왔는데, 전문을 예서로 작품으로 만들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작품 작업을 제안 받을 당시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진료받는 중이었다. 불자로서 생활이 바빠 적극 불심을 펼치지 못한 점이 후회스러워 아내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작품에 임했다.

재원을 지원 받는다고 하더라도 금으로 글씨를 써 내려가는 작업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처음에는 금을 붓에 충분히 적셔 적어내니 5~6자 정도는 쭉 쓰게 됐다. 하지만 작품을 의뢰한 스님은 금을 한번 찍어서 한 글자씩 써 달라고 부탁했다. 방대한 양의 법화경을 한 글자씩 쓴다면 작품 완성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한 작품을 가지고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하기로 미리 예약까지 한 상황이라 머리가 복잡했다. 아무래도 기간을 맞추기 어려울 듯해 전시 연기를 고려하던 중 예술의전당에서 예서 강의 의뢰 연락이 왔다.

예술의전당 부탁은 금니법화경 작업을 하며 찾아온 행운이었다. 작업 과정을 들은 예술의전당 쪽도 작업 중인 작품을 보고 전시 기간을 부처님오신날에 하도록 배려했다. 이에 부응하려고 정성을 담아 작품을 완성해 전시했다.

청기만건곤(淸氣滿乾坤) 왕면(王冕) 시(詩) (2016년 작).
청기만건곤(淸氣滿乾坤) 왕면(王冕) 시(詩) (2016년 작).

-서예가로 활동하며 가진 특별한 신념은.

▶소암 선생님께 글씨 공부는 물론 인성이나 자기계발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70년 넘게 살아오면서 힘든 순간을 이겨 내려면 즐기는 방법이 최고라 여겼다.

얼마 전 고향인 제주를 찾았을 때 삼광사 현명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강원도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을 만나 뵙고 적멸보궁에도 다녀오라고 권하셨다. 무릎이 좋지 않아 주저했지만, 간곡한 부탁에 종이와 먹을 준비해 산을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돌계단이 많아 사자암에서 보궁까지 몇 차례 오르내렸더니 무릎 통증이 심해졌다.

다음 날 적멸보궁을 오르지 못해 월정사의 말사인 상원사에서 정념스님께 드릴 의상대사 법성게를 팔곡병풍으로 써 내렸다. 이제껏 작품마다 정성을 들였지만 이번에 기도하는 마음까지 실었더니 작업실보다 글씨가 잘됐다.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작품에 녹여야겠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민준석·안유신·이은채 인턴기자 chae@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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